"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대안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에 논리적으로 접근하거나, 반대 의사만 비춰도 천하의 버르장머리 없는 연놈이 되었다. 몇 날 며칠을 후레자식이 되어,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했다고 빌고 빌어야 간신히 조용해졌다."
아버지의 폭력엔 타당한 이유가 없다. 딱히 논리적인 구석도 없지만 아버지의 폭언에는 대항할 기력이 생기지 않는다. 알이 얼었건 얼지 않았건 무작정 품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속 펭귄 수컷을 가리켜 "저게 부모다"고 소리친다. 자신이 가족을 위해 헌신한 만큼 "입 닥치고 밥을 차리고 또 차리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외가를 벌어 먹이고 자식들을 키워낸 공덕을 방패 삼아 어머니를 때리고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반대 의견이 나오면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거나 미친놈, 빨갱이 새끼라고 혼자 개탄하며 TV를 보는 아버지다. 아버지의 폭언은 언제나 엄마 앞에서 극에 다다랐다. "남편을 위할 줄 모르니까 새끼들이 제 아비를 다 허수아비로 알잖아! 어쩔 거야. 응? 네가 책임져야 할 거 아냐. 이년아… 이런 오사할 년아!" 급기야 시집 못 간 '나'때문에 머리채를 잡힌 엄마가 TV 모서리에 찍히고 오빠 집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가 쏘는 폭력의 화살은 온전히 '나'를 향한다.
김이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는 가부장제 아래 똬리를 튼 폭력에 집중한다. 시종일관 집요하게, 그림을 그리듯 작가는 아버지의 폭행과 아집, 욕설을 조목조목 적어낸다. 독자는 읽는 동안 현실에서 만났던 폭력의 상징을 떠올리며 불편할지 모른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에 기댄 아버지의 자기밖에 모르는 심통은 공교롭게도 텔레비전과 창밖에서 왕왕 대는 대통령 선거 운동 방송과 오버랩된다. "돈이라면 치가 떨린다"며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다 돌아선 '나'의 애인 규원이 지긋지긋해하던 가난. '나'와 공부방 동료 선생님들이 치킨과 맥주로 넋두리해가며 견뎌내는 지독한 일상의 불행. 아버지의 주먹질과 별반 다름없는 이런 폭력의 현장에 선거 방송 차량은 배경음악처럼 등장한다. 마치 선거 결과가 가져올 새로운 국가 권력의 실체 또한 이들 여러 폭력과 다름없다는 비보를 알리듯 말이다.
치킨을 뜯던 '나'는 엄마가 사라졌다는 오빠의 전화를 받고 급히 집으로 달려간다. "엄마는 거실에 널브러져 꺽꺽 숨을 올리고 있었다. 거실 바닥 군데군데에 핏자국이 말라 있었다." 폭력은 활화산처럼 되살아났고, 잠잠해진 폭력의 뒷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었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예측이 어려워서다.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만신창이가 된 게 안 보여요?"라고 대드는 '나'는 재차 폭발한 주먹질에 속절없이 짓밟혔다.
30년 만의 혹한이 예보된 겨울, '나'가 맞게 될 한파는 날씨에 국한하지 않는다. 딸과 아내를 향한 아버지의 손찌검이 예년보다 날카롭고 차가울 것이고, 대통령 선거 결과는 가난을 짊어진 '나'의 애인을 개발이란 이름 아래 더욱 차가운 현실로 몰아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추운 겨울이다.
◆김이설
1975년 충남 예산 출생.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 장편소설 , 이 있음.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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