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계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시계방 주인이 그런 식으로 다그치니, 성진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일련번호를 알고 있으니 경찰서에 분실 신고를 내겠다고 성진이 말하자 (시계상은) 그를 미친 사람인 양 쳐다보면서 헛헛거리고는 마침내 황학동의 정시당이라는 가게 이름을 댔다."
'홍콩 면세점에서 3,000달러를 주고 샀다'는 주장과 '짝퉁'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태그호이어 카레라 칼리버 16'의 행방을 찾아나선 옛 연인의 짧은 여로가 올 여름호에 실렸던 김연수의 단편소설'벚꽃새해'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 시계의 진짜 브랜드는 태그호이어가 아니다. '메타포'다. 2012년 12월 20일, 세 개의 초침이 모조리 자정 무렵에 몰린 채 새벽 12시 54분 49초에서 멈춰버린 시계. "배신도 이런 배신이 있을까나. 나는 청춘의 순정을 다 바쳤는데, 그게 짝퉁이었다네."
이제는 젊은 작가라고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한 김연수 작가가 그야말로 젊은 세대들에게 건네는 위로인 이 소설은 "진짜로" 그날 그 시간에 자신의 손목시계가 멈춰버렸던 경험에서 착상됐다. 재치로 번득이는 연애담은 정치사회적 현실과 퍼즐처럼 들어맞고, 두 연인의 태국 여행과 황학동 상인의 진시황 병마용으로 상징되는 역사는 그것이 그토록 오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현실의 울분을 달랜다.
"몇 해 전, 스물 네 살, 꿈 많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 그녀는 태국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내려오다가 그렇게 물을 뒤집어쓴 적이 있었다. 쏭끄란, 그러니까 4월 13일의 태국 설날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자신의 새해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하며 물을 뒤집어쓴 것인데, 물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다."
작가는 전화 통화에서 "'벚꽃새해'는 소설을 쓸 무렵 우연히 보게 된 몇 가지 이미지들이 합쳐져 휘몰아치다가 나온 소설"이라고 말했다. 쏭끄란은 실제 작가의 생일 무렵이기도 하다고. 벚꽃이 만개하는 생일 무렵이면 항상 다시 태어난다고 혼자서 생각해오던 차에 쏭끄란을 알게 됐단다.
"아유타야를 침략한 버마군이 불상들의 목을 자를 때 떨어진 불상의 머리 중 하나를 보리수의 뿌리가 감싸 안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머리는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뿌리와 하나가 됐다. 둘은 나란히 서서 그 뿌리 속 부처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성진은 정연의 숨소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진이 보리수 뿌리에 감싸인 부처님 얼굴을 생각하는 동안, 세상이 근사하게 바뀌는 동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마침내 지하철이 역 구내로 들어오는 동안."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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