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얼마나 첨예하고 전투적인가 새삼 일깨워준다. 수백 건의 오류가 발견된 해당 교과서의 저자들은 다른 교과서 저자들이 '좌파'이며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이야 말로 바른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사회적 논쟁에서 수세에 몰릴 때마다 논리와 사실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방패로 삼아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는 일부 지식인의 '용감함'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은 무조건 '수구우파' 또는 '종북좌파'적이며, 따라서 반대의견을 차분히 검토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수고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정부가 개입해서 모든 교과서의 오류를 다같이 고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 결코 간단치 않을 것 같다.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우리나라가 사회갈등으로 소모하는 비용이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는 언론보도를 보았다. 갈등은 다양한 이익이 충돌하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예방하고, 관리하고, 조율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역사교과서를 8종이나 인가하는 것이, 우리 학생들의 교양수준을 올리는 데 어떤 실익이 있을까? 교과서는 한 권만 저술하되, 보수와 진보쪽 학자들을 동수로 저자에 참여시키고 양쪽의 해석이 상이한 사실(史實)에 관해서는 '다양한 관점들'이라는 섹션을 두어 모두 소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여러모로 미숙한 감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힘겨루기와 경쟁을 통해 관철하는 제로섬게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진영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양보를 하는 순간, 패배한 걸로 간주하는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들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반영될 때 이미 파국은 예정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파국이 일상화될 때 그 사회와 국가의 효율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런 저효율은 시스템 자체의 불안정을 가져온다. 이 불안정성은 구성원들의 소속감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나만 살고 보자는 식의 한탕주의와 이기심을 불러오는 연쇄효과가 있다. 이러한 연쇄효과에는 어떤 정보가 어떤 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확산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전자민주주의를 활성화시켜준 큰 장점이 있으나, 극단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쉽게 뭉쳐서 자신들만의 우물을 파고 그 안에서 서로를 고무하며 견해가 다른 이들을 고립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일상에 깊이 침투한 우리들에게 이런 극단주의적 입장은 그 선명성 덕분에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자신들만의 논리에 빠져들면 중도적이고 균형 잡힌 정보조차도 편파적인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세상이 온통 부당하고 부적절한 정보의 시궁창으로 비쳐질 수 있다. 왜곡된 정보일수록 과장된 수치나 사진, 동영상으로 덧입혀져, 마치 상당한 공신력이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치 시소의 한 쪽 끝에 앉아서 가운데를 바라보면 실제 위치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의제의 우선순위에 관해 합의하지 못하는 이유로 바로 이런 착시 현상을 들고 있다.
한국이 "저성장 기조 속에 정책, 투자 결정은 느려지고(Slow), 산업, 근로자들은 늙어가고(Old),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Sandwiched)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어" 조난신호(SOS)가 울리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보았다. 한국 사회의 'SOS'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은 갈등관리의 실패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원하는 바를 한 번에 관철하려는 욕심은 구토와 배탈을 부르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 하기 보다 한 발짝 한 발짝, 점진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뤄가는 것. 이것이 우리를 SOS 상황에서 탈출하게 하는 비결이 아닐는지.
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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