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4기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
아리 플라이셔 전 백악관 대변인이 부시 정부가 내린 중요 결정들을 오바마 정부가 유지하고 있다며 한 말이다. 오바마의 테러ㆍ핵ㆍ생화학무기 정책은 부시의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안보와 사생활의 균형 문제도 부시 정부의 현안이었다. 2009년 1월 퇴임한 뒤 텍사스 댈러스에서 스스로 유폐된 삶을 살고 있던 부시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워싱턴 정치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부시가 재임 중 보여준 결단과 신념, 책임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 역시 강하다. 부시의 보좌관 출신인 윌리엄 인보든 오스틴대학 교수는 "부시를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대통령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실용적 접근에 나선다며 원칙 없이 흔들리는 모습과 대비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공화당이 강경 보수 행보를 보이면서 부시는 중도주의자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부시는 퇴임 후 텍사스의 평범한 주민으로 살았다. 정치보다는 그림에 관심을 두고 골프를 치며 상이용사들과 자전거를 탔다.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는데 사령관이 골프를 치면 안된다고 하던 부시는 지금 집에 퍼팅 연습장까지 마련할 정도로 골프에 빠져 있다. 프로야구 텍사스레인저스 경기장에 지정석을 마련하고 댈러스의 식당을 찾으며 핼러윈데이 때는 우주인 복장으로 손녀와 시간을 보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선거운동에 뛰어들고 딕 체니 전 부통령이 회고록 출간 투어를 하며 현 정부에 쓴 소리를 뱉을 때도 부시는 침묵을 유지했다. 한 정치 평론가는 "빌 클린턴이 세계의 시민이라면 부시는 댈러스의 시민"이라고 표현했다.
부시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그러나 최근 갤럽 조사에서 처음으로 호감도(49%)가 비호감도(46%)를 넘어섰다. 자신감을 얻은 부시는 조심스럽게 현실정치에 대한 발언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민개혁법의 의회 통과를 촉구해 오바마 정부에 힘을 실어준 반면 비공개 유대인 단체 기조연설에선 이란 핵협상에 비관론을 펼치며 오바마 정부에 경고했다. 보수유권자운동 티파티가 주장하는 미국의 고립주의는 부시가 가장 우려하는 사안이다. 반대로 티파티는 부시의 온정적 보수주의를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세력이다. 부시는 티파티의 공격을 받는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을 위해 5,000달러를 기부하기까지 했다.
부시에게 정치적 지향점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마크 업디그로브 린든 존슨 대통령 도서관장은 "부시는 역사적 위상에 대한 집착을 놓았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해도 부시에 대한 경계는 아직 만만치 않다. 진보 시민단체 무브온시민행동의 안나 갤런드 사무국장은 "시간이 부시 시절 기억을 흐리게 할 수 있으나 이라크 전쟁과 2008년 금융위기의 희생은 시간이 지나도 경감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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