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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5일] 일본에게 할 말과 삼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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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5일] 일본에게 할 말과 삼갈 일

입력
2013.11.0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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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엊그제를 '문화의 날'이라고 부른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를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지정된 법정공휴일이다. 하필 11월 3일인 이유는 1946년 이 날 평화와 문화를 국시로 내건 일본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한 해 전인 1945년까지만 해도 11월 3일은 '메이지(明治)의 날'이었다. 근대화 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의 초석을 놓은 메이지 일왕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군국(軍國)의 추억이 평화의 이상을 만나 문화의 미명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연한 만남은 아니었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죽은 일왕의 생일에 때맞춰 '평화헌법'을 공포했던 것이다. '쇼와의 요괴'가 선택한 그 노회한 타이밍은 지금도 의미심장하다.

일본 전후처리의 최대 관건은 천황제의 존속여부였다. 종전 직후 미국 국내여론 및 일부 승전국들은 일왕의 전범기소와 왕정폐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점령통치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일왕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맥아더 사령관에게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왕정유지(1항)과 전쟁포기 및 비무장(2항)을 연계한 헌법초안의 대강, 소위 '맥아더 노트'였다. 특히 평화헌법 9조의 기원이 되는 2항은 원래 유엔헌장도 인정한 주권국가의 정당한 자위권마저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헌법학자의 표현을 빌면 핵심은 군국 일본의 표상인 '황군'(皇軍)에서 군(軍)을 죽여 황(皇)을 살리는 데 있었다. 결국 전후 일본의 비무장 평화는 천황제 존속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평화헌법 9조는 재조명이 필요하다. 9조는 미국의 일방적 강요가 아닌 대타협의 산물이었다. 일본정부는 군대를 포기하는 반대급부로 이른바 '국체호지'(国体護持)를 얻어냈다. 이는 또한 군국주의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천황제는 지키고 싶어 한 "일본국민의 자유의지" (포츠담선언 12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온 일본사회의 중첩적 합의다.

더 나아가 9조는 국내적 사회계약을 넘어 국제협약의 성격을 갖는다. 점령 하의 일본정부는 전쟁능력 포기를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가로 천황제 존속을 승인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9조는 천황제를 규정한 1-8조와 한 묶음으로 봐야 한다.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9조 없이 천황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극우보수 세력은 평화헌법을 '강요된 헌법', '맥아더 헌법'이라고 경원시하며 헌법개정이나 '해석개헌'의 명분을 자주와 주권의 논리로 강변한다. 9조의 개정이 주권국가의 국내문제이며 이에 대한 이웃나라의 우려표명은 내정간섭이라고 몰아붙인다. 개헌은 일본 내부의 문제라며 이를 방조하는 미국과 일부 국제여론의 반응 역시 몰역사적이긴 오십보백보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의 대일외교는 천황제가 유지되는 한 9조의 일방적 개정은 전후 동북아를 지탱해온 원초적 국제협약의 위배라는 보편타당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경계심이 '천황'을 경애하면서도 진심으로 평화를 염원하는 전후 일본국민의 주권적 의지와도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을 더 이상 외면할 이유는 없다. 이 참에 우리 입장이 한일 간의 특수한 과거에 고착된 아집과 과민반응이 아님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것도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동시에 일본국민 사이에 점증하는 혐한 감정을 쓸데없이 자극하는 행동은 삼갈 필요가 있다. 사실상 영토분쟁의 섣부른 군사화나 위태위태한 '외교의 사법화'가 다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 대일외교의 가장 큰 원군은 일본의 침묵하는 다수일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리하며 피하지 못할 한일 정상회담을 차분히 준비할 때다.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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