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생 박모(28)씨에게 구직의 벽은 너무 높았다. 면접은커녕 서류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했고 자격 미달로 원서조차 내지 못하는 기업도 많았다. 최고 530점에 불과한 토익 점수를 끌어올릴 방법을 고민하던 중 한 인터넷 게시글에서 눈에 번쩍 띄는 댓글을 발견했다. ‘고득점 보장, 토익 대리시험 쳐 드립니다.’ 지난달 27일 부산 북구 덕천동의 한 시험장에서 토익 시험을 본 박씨의 가채점 결과는 놀랍게도 990점 만점이었다.
첨단 장비를 이용해 토익 시험을 부정하게 치른 수험생과 브로커 일당이 경찰에 적발됐다. 팔 깁스에 스마트폰을 숨겨 답안지를 촬영해 전송하고 지름 2㎜의 초소형 음향수신장치를 이용해 응시생들에게 정답을 전달하는 신종 수법이 사용됐다.
부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4일 돈을 받고 토익 시험 답안지를 유출한 혐의(업무방해)로 이모(30)씨 등 3명을 구속했다. 경찰은 또 이들에게 400만원씩을 주고 답을 받아 부정 응시한 박씨 등 1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전기기사 자격증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허모(31)씨와 범행을 공모했다. 이씨는 대학생 대상 기계공학 기술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고, 허씨 역시 컴퓨터 프로그램 전국대회에서 3위에 오른 실력자. 이들은 지난 2월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선수신기 등 20대를 구입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범행을 시작했다.
먼저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통해 ‘토익 고수’인 명문대생 엄모(27)씨를 섭외했다. 올해 네 차례 토익 시험에서 평균 970점을, 8월에는 990점 만점을 받은 엄씨는 시험 한 회당 150만~200만원을 받기로 하고 범행에 가담했다. 이들은 인터넷에 ‘토익 대리 칠 사람’, ‘토익 대리 치고 싶다’ 등의 글이 뜨면 댓글을 달아 ‘고객’을 모집했고, 순식간에 대학생, 취업 준비생, 공기업 직원 등이 연락해왔다.
엄씨는 지난달 27일 왼팔에 깁스를 한 채 부산 덕천동의 토익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는 문제를 푼 뒤 깁스 안에 숨겨둔 스마트폰과 무선 리모콘을 이용해 4차례에 걸쳐 답안지를 촬영했다. 촬영된 사진은 자동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전송되도록 미리 설정돼 있었다. 귀 안에 초소형 수신기를 넣고 같은 시험장에 들어간 ‘고객’12명은 시험장 밖에서 이씨와 허씨가 무선 마이크를 통해 불러주는 정답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시험이 끝난 뒤 응시생들은 미리 준비해 간 현금 400만원을 이씨에게 흔쾌히 건넸다.
조사결과 부정 응시생들의 기존 토익 평균 점수는 500~600점이었으나 이날 시험에서 모두 800~900점대를 받았다. 여기에는 국내 최고 명문대생도 1명 끼어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 등 3~5월 각종 부정 수법 실험을 통해 적발 위험은 줄이고 고득점 확률은 높인 이 같은 수법을 개발했다. 대포폰, 대포차량을 사용하고 시험 하루 전 응시생들에게 무선수신기 등을 지급하고 사전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점까지 받은 엄씨가 계속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주관사 YBM한국토익위원회의 제보로 경찰에 수사에 나서며 완전범죄의 꿈은 깨졌다. 경찰은 6~9월 치러진 토익 시험에서도 다른 부정 응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부산=강성명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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