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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진 삐딱이들, 장기불황 시대를 꼬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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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진 삐딱이들, 장기불황 시대를 꼬집다

입력
2013.11.04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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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언저리 여섯 남자 뭉쳐 쓰고싶은 글 실어줄 곳 없어 창간부동산 문제 풍자하는 시험지… 동성애자 보수화 가능성 우려 칼럼DIY 가구에 대한 서글픈 농담… 다양한 내용 파격적 형식으로 다뤄1000부 내외 나오는 대로 매진"뭔지 잘 모르지만 문제가 있다… 공감대 형성이 '도미노'의 목표"

"'도미노' 알아?"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피자 아냐?'라고 반문하겠지만, 혹시라도 '피자 말고?'라고 되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술 담론과 사회 문제와 정치철학과 국제 정세와 하위문화와 인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은 동시에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가장 핫한 독립잡지" "독립출판의 최첨단" "불친절하고 난폭하지만 지나치게 재밌고 유익한" 등의 평가를 받는, 30대 초ㆍ중반의 여섯 남자가 편집 동인으로 모여 펴내는 비정기 문화 잡지 '도미노' 얘기다.

이 잡지 제4호가 나온 9월 15일 이후 트위터에서는 '도미노 돌풍'이 불었다. "드디어 '도미노'가 나왔다"부터 "도미노의 ○○글 너무 재밌다" 등의 트윗이 끝없이 타임라인에 이어졌다. 어디서 구해야 할지,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도 모를 이 정체 묘연한 잡지에 대한 궁금증을 참고 또 참다가 동인들이 작업실로 빌려 쓰는 서울 을지로의 한 사무실에서 마침내 만난 게 지난달 31일.

"사실 독립잡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친구들이 많이 만들어요. 90년대 홍대 선배들과 2000년대 홍대 후배들 사이에 낀 세대끼리 트위터를 통해 서로의 글을 눈여겨보다 마음이 맞아 뭉친 거죠."

김형재(34ㆍ그래픽 디자이너) 노정태(30ㆍ자유기고가) 박세진(40ㆍ패션 컬럼니스트) 배민기(32ㆍ그래픽 디자인 박사과정) 정세현(34ㆍ록밴드 '404' 기타리스트 겸 보컬) 함영준(35ㆍ미술공간 '커먼센터' 디렉터)씨가 바로 이들. 각자 생업이 있는 이들 여섯 남자가 뭉쳐 첫 호를 낸 게 2011년 6월이었다. 다른 매체가 아닌 잡지의 형식을 택한 것은 "잡지라는 양식이 한 사회의 시대 상황이나 분위기를 잡아내는 데는 최적이기 때문"이었다.

"광고나 원고 의뢰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글들"

오늘날 대부분의 잡지들은 한 산업의 파생상품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문학 잡지가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혹평할 수 없고, 패션지가 바로 뒷장에 광고가 실린 패션 브랜드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 잡지의 쇠퇴를 불러온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도미노는 원고 의뢰나 광고가 들어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들을 다루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문제의식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쓰고 싶은 글은 너무 많은데 솔직히 실어줄 만한 데가 없어서 아예 잡지를 만들어 버린 거죠."

잡지는 파격적이고(혹은 파격적이지만) 흥미롭다. 만화, 패션, 소설, 영화 비평, 서평, 사회 비평, 문화 비평 등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컨텐츠가 실린 말 그대로 종합 잡지다. 하지만 기저에는 모든 필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이 분명한 어떤 동일한 가치와 태도가 흐르고 있다. 88만원 세대의 정서라고 요약하기엔 반경이 매우 넓은,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기 불황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Pheeree'라는 필자가 쓴 '2013년도 제1회 연습 문제지 (1차)'라는 글은 수능 모의고사 시험지를 그대로 재현한 객관식과 서술형 주관식 형태의 문제지가 글의 전부다. 문항들은 주로 88만원 세대와 강남ㆍ목동 거주 학부모, 결혼 적령기 자녀를 둔 하우스 푸어 노인 등이 '이런 상황에서 보일 만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와 같은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문제를 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부동산에 집약돼 있음을 낄낄거리며 새삼 각성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함영준의 '너랑 내가 잘났으므로'는 요사이 자주 듣게 되는 '힙스터'라는 용어가 세련된 취향의 젊은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취향의 상징들을 소비함으로써 멋지게 보이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젊은이들을 비아냥대는 용어로 전유되는 과정 및 이유를 참으로 조곤조곤 '까댄다'. 제이슨 박의 '평등 성취로 인해 부서진 게이들의 꿈…'은 "조만간 착실히 돈을 모아 결혼한 후 아기 기를 계획을 세우는 게이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며 동성결혼 합법화로 인한 동성애자들의 보수화 가능성을 우려하는 글. DIY 가구 조립의 개인사와 노하우를 기술한 '네가 알아서 하라'는 젊은이들의 독립의 꿈이 변두리 연립주택 단칸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대한 서글픈 농담으로 읽힌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교양 "

비정기 문화 잡지이기는 하지만 동인들끼리는 반 년에 한 번씩은 잡지를 내자는 약속이 있다. 제작비는 서울문화재단이나 경기문화재단 같은 공공기관의 지원금을 보태면 이전 호의 판매 수익으로 충당이 가능하다고. 첫 호부터 북소사이어티, 유어마인드, 가가린 등 독립서점을 통해 유통하鳴?3호부터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도 판매하고 있다. 대형 서점 판매 문의는 해본 적이 있으나 "기존의 도서 분류 체계에는 도저히 포섭이 안 된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발행 부수는 1,000부 내외로 나오는 대로 거의 다 팔아치웠다. 1호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완전 품절 상태다. 올 봄 발행 20년 만에 처음으로 재쇄를 찍어 화제가 됐던 봄호 초판 발행 부수가 4,000부였으니 '독립잡지의 히트 상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편집의 파격도 도미노를 읽는 재미 중 하나다. 시험지 형태의 원고에서부터 각주 모음의 형식까지 단 하나의 원고도 똑같이 편집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잡지 편집을 전담하고 있는 김형재씨는 "직접 원고를 쓰지는 않지만 이 잡지의 편집이 곧 제가 쓰는 글"이라며 "글을 쓰건 편집을 하건 모든 동인들이 반년간 거의 매주 모여 치열하게 얘기를 나눈 결과가 바로 도미노 각 호"라고 말했다.

동인들은 도미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우리 시대의 교양" "이 정도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도미노의 성공은? "사람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인식의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도미노는 성공한 거예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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