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KT회장의 사의 표명은 예상됐던 일이다. 나름대로 오래 버텼지만 결말은 예정돼 있었다. 그는 2002년 민영화 이후 관료 출신으로는 최초로 KT의 수장을 맡아 4년 반 동안 많은 성과를 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다음해인 2009년에 임명된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에 결국 물러나게 됐다. 이 정부 초기부터 사퇴 여부로 주목받아온 그가 물러남으로써 새 정부의 '사람 바꾸기'에는 가속도가 붙게 됐다.
명민하고 판단이 빠른 그는 전임 남중수 사장이 물러난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회장처럼 연임 CEO였던 남 전 사장은 이명박 정부의 첫해인 바로 이맘때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었다. 이번엔 이 회장이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5년 전의 일이 판박이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아무리 정당이 같고 우호적이더라도 사람을 바꾸려 한다는 걸 왜 모른 척한 것일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가 지난해 3월 연임을 하지 않고 물러나 다른 사람이 회장을 맡았다고 하자. 그때는 이명박 정부의 입김이 절대적이었으니 누군가 다시 MB쪽 사람이 임명됐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박근혜 정부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 3년 임기를 채울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 회장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짧게, 그리고 더 망신을 당하면서 물러나게 됐을 거라고 보는 게 '건전하고 보편타당한' 일반국민의 관측이다. 아무리 민영화한 기관이나 민간 기업이라도 사람을 바꾸려고 마음먹으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얼마나 정통한 감각으로 거취를 결정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직을 전리품으로 생각해 자기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전통'이 온존하며, 누구나 다 그걸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런 상황에 맞춰 살아가려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엉망이라는 점이다.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중도 사퇴나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 경질에는 저마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거나 꼬투리 잡히지 않을 무결점 인간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전히 비위나 잘못, 자격 미달로 인해 책임을 지고 물러났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석채 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크고 작은 공직이나 공공기관의 장들은 눈치를 살피며 줄을 서지 않을 수 없다. 몇 달 전에도 어느 부처의 산하기관 책임자가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부처에서 일했던 사람이 장관이 됐지만,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자리를 챙겨줘야 할 측근이 있었던 것이다. 물러난 사람은 다른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아직도 반년 가까이 그냥 놀고 있다.
공직사회만 그런가. 공직사회의 분위기는 민간에 그대로 전달된다. 인사에서의 바람직하지 못한 낙수(落水)효과다. 특히 정권의 바람을 타는 방송사에서는 납득하지 못할 일이 여전히 벌어지곤 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모 방송사에서는 '대리' 발령이 성행했다. 부장을 시켜주고는 싶은데 그 자리에 갈 만한 직급에 있지 못하니 일단 '대리'로 발령한 다음 불과 얼마 후에 자리를 챙겨주는 식이다. '대리' 발령이 잦자 "우리 회사가 대리회사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씨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려온다.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공직을 전리품화하지 않겠다고 지난해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약속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나라의 품격이 나아질 수가 없다. 이 인사 악순환의 고리가 언제나 끊겨 국민들이 저마다 성실하게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게 될 것인가.
임철순 논설고문 y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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