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십여 년 전 강원도 평창으로 귀촌해 폐교를 개조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침 그 즈음 문화부의 학교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을 유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읍내의 평창초등학교와 중학교에는 전교생이 국악을 체험할 수 있도록 악기와 강사를 지원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초등학교와 중학교만 지원을 하느냐고 서운해 하시길래 고등학교는 입시 때문에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다 했더니 시골학교일수록 학생들이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시며 조심스레 그룹사운드도 되냐고 하신다. 그리고는 밴드 동아리 학생들을 보내셨는데 이 밴드의 이름이 코믹하게도 '대일밴드'였다.
이들은 학교 강당의 체육기구 보관하는 귀퉁이 창고에서 옹색한 장비와 악기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학교에서는 약간 문제 동아리 같은 인식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비록 열악한 상황이지만 서로를 가르쳐 가며 근근이 동아리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고민하던 중 마침 인근 원주에 거주하면서 서울의 프린지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기도 했던 지역음악가 김희범이 이들의 지도를 자청했고, 악기 강습과 합주에 멘토링도 하면서 방학이면 캠프도 하고 록페스티벌 견학도 갔다.
이때 처음 만난 2학년의 동아리회장 안병근군은 음악을 좋아하는 여느 십대처럼 그저 기타가 좋아 밴드에 들어갔지만 남다른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동료 학생들을 이끌며 본인도 열심히 하여 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4년제 대학의 실용음악과로 진학을 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꿈 꿔온 것과는 다른 대학 과정과 분위기로 중도에 그만두고 군 입대를 한다. 군 복무 중에도 음악가의 꿈을 놓지 않았던 그이지만 정작 제대 후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음악과 전혀 무관한 아르바이트가 다였다.
이런 안군에게 학생시절 음악을 배웠던 스튜디오의 운영과 함께 지역 후배들에게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장비를 활용하여 음향 엔지니어의 기능도 습득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문화리더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대학 진학을 권유 받아 경희사이버대에 입학을 하여 일을 하면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의 표현대로 농촌에서 태어나 세상을 놀이터처럼 신나게 잘 놀면서 자란 안군은 이제 음악가로, 강사로, 엔지니어로, 기획자로 그리고 대학생으로 일인다역을 하며 열정적인 20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지역의 후배들에게 롤 모델로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런 안군은 요즘 더욱 뜻 깊은 가을을 맞고 있다. 여러 일로 바쁜 가운데에도 틈틈이 작업한 자신의 첫 음반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름은 어울리게도 '첫 번째 시도'. 시골 마을의 정감과 자연 풍광이 잘 그려지는, 농촌에서의 영감이 물씬 풍기는 곡들로 이루어졌다. 작곡에서 작사, 연주와 노래에 녹음까지 본인이 다 직접 기획하였으며, 학교 후배와 친구들이 글과 연주, 촬영과 공연에 참여해 주었다. 음반의 텍스트는 한 마을주민의 아름다운 손글씨로 채워지게 되었으며, 한국인 최초의 그래미 녹음상에 빛나는 황병준감독도 기꺼이 이 음반의 마스터링을 맡아주었고, 사회공헌 활동에 열심인 디자인회사 우디도 재킷의 마무리를 도와주었다. 모두 이 시골 청년음악가의 십 년의 꿈을 가능케 한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농촌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척박한 여건으로 꿈을 접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전문 문화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일차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지만 문화예술교육이나 지역문화, 예술인복지 또는 재능기부의 활성화 등의 정책과 사회적 노력이 함께 할 때 더 힘이 된다. 안병근군의 음반 '첫 번째 시도'가 처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한 사람의 특출한 사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선철 용인대 교수 ·감자꽃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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