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한국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1년간 소식지에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망설이다가 쓰기로 했습니다. 대구가 전태일(1948~1970)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대구에 꼭 전태일장학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장히 큰 금액을 낼 것도 아니면서 어디에 사람을 선발해달라고 청하기도 민망해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대구 정평위에 원고를 쓰고 원고료를 기부한다면 정평위에서 장학금을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 뿐 아니라 소식지 편집위원인 박병규(41•경북 상주 선남성당) 신부님과 다른 정평위 회원들도 보탤 것이라 합니다.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 지역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그 지역 전교조 선생님들께 선발을 의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굳이 대구에 전태일장학금을 만들려는 것은 이곳이 전태일 정신과는 가장 먼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권력자들의 편에 주로 서온 이곳이 대구사람 전태일을 이야기하면서 약자들의 권리에도 눈뜨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다녔고 평생 주린 창자가 차도록 밥 한끼 포식해본 일이 드물었으며 죽을 때까지도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지만'(조영래 지음 )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늘 먼저 생각했고 그들을 위해 재단사가 되었고 재단사가 되어도 그들의 처지를 바꿔주지 못하자 노동부와 서울시, 언론사를 뛰어다니며 호소했지만 누구도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지켜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온몸을 불살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세상을 떠난 이 시대의 성인(聖人) 전태일(1948~1970). 그의 죽음으로 비로소 한국사회는 휴일도 없이 하루 열네시간을 꼬박 앉아서 솜먼지를 마셔가며 일해도 밥 세끼를 넉넉히 먹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이듬해 박정희 정권의 독재인 10월유신이 시작되면서 당장의 노동조건이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한국사회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던 것은 그의 죽음 덕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11월 13일입니다.
대구는 그가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는 1년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 열다섯 살 무렵 대구 중구 남산동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야간학교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하고 같은 반 여학생한테 설렘도 느끼고 체육대회를 치르던 그 시절을 유일하게 인간답게 산 시절로 그는 기억했습니다. 대구에는 그가 살았던 표지판도 없고 그가 대구사람이었는지조차 아는 이들이 드물다고 박 신부님은 말합니다. 2001~2009년 프랑스에 유학, 리용가톨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 신부님은 "프랑스에서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극우였는데 여기 오니까 극좌가 되는 곳에서 전태일을, 그가 꿈꿨던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대구 뿐 아니라 지금 한국사회 전체가 수구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진실이 왜곡되고 공직자들이 거짓말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부정이 드러나도 자리에 버티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정치개입을 하고 경찰이 그걸 은폐했는데 그걸 밝히려는 걸 법무부와 검찰 일부가 야합을 해서 막아놓고는 그걸 밝히라는 것은 대선불복이라고 합니다. 국군의 날에 행군을 하고 새마을운동이 살아나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위한 행사까지 벌이니 사기꾼까지 등장합니다.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 모든 뒷걸음질이 과연 역사를 얼마나 퇴행시킬까요.
이 뒷걸음질을 잡아채서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은 동시대인들의 힘만으로는 약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을 불러옵니다. 그들을 불러오면서 과거를 바로 보게 되면 좋겠습니다. 빗방울도 눈송이도 먼지가 없으면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모든 지역에서 진보에 몸바친 이들을 불러모아 주십시오. 그래서 뒷걸음치는 역사를 바로 가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면서 닿게 되는 과거는 가난한 자와 올바른 자를 핍박하면서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만 호의호식하던 무시무시한 세월이었다는 점을 위인과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