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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0월 31일] 너 어떻게 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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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0월 31일] 너 어떻게 살았니?

입력
2013.10.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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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 쌓아둔 이삿짐을 정리하다 찌그러진 라면박스를 발견했다. 이사를 몇 번 하는 동안 끌러보지 못한 박스였다. 잡동사니가 들어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색이 변한 원고지 뭉치가 나왔다. 오래 안 입은 옷에서 두툼한 지폐 다발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라면박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란색 만년필을 사용한 붉은 칸 원고지의 원고는 노트북과 함께 분실한 줄 알고 포기했던 시의 초고들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먼지를 불어내면서 흐릿해진 오래 전의 시들을 읽었다. 원고지 사이에 눌려있던 강아지 털이 떨어지고 있었다. 믹서견인 줄 모르고 모란시장에서 사와 몇 년을 키운 강아지가 떠올랐다. 나는 시와 강아지 털이 놔준 징검다리를 밟고 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층집 난간에 기대어 단풍 든 아차산 등산로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배기 아이의 손에 이끌려 대성암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아이가 산등성이에서 입을 벌린 채 팔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아이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 나에게 냅다 쏘아붙였다. 아빠, 나 지금 바람을 마시고 있잖아요!

처음엔 강아지를 집 안에서 키웠다. 그런데 털이 하도 빠져 어쩔 수 없이 밖에 내놓게 되었다. 내가 밖에 나가면 아이가 잽싸게 강아지를 집 안으로 들였다. 집 안에 강아지 털이 안 박힌 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아이가 풀 수 없도록 강아지를 난간에 매놓았다. 그래도 빠진 강아지 털이 날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 년쯤 키우던 강아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개 도둑이 이층까지 올라와 데려갔을 확률은 희박했다. 밥을 들고 나가면 별의별 쇼를 다할 놈인데 보이지 않았다. 찡얼거리다 목줄이 빠져 일층으로 떨어진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살이 찐 몸이라 해도 이층의 높이는 족히 3∼4미터는 되었다. 떨어졌다면 무사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강아지의 흔적은 골목 어디에도 없었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으로 집 주위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전봇대에 강아지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붙였다. 나는 강아지가 벗어놓고 간 목줄을 사려놓았다. 아침이면 습관에 따라 강아지 먹이를 데워 나갔다.

강아지가 사라지고 이 주일쯤 지난 아침이었다. 가까운 곳에 가 바람이나 쐬려고 골목에 주차시킨 차에게로 갔다. 시동을 걸어놓고 히터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데 웬 강아지가 옆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어디에선가 보았다 싶은 얼굴이었다. 널 어디서 보았더라? 어디서 보았더라? 강아지는 바지에 등을 비비면서 뒹굴었다. 내가 널 어디서 보았나? 나는 퍼뜩 생각이 안 잡혀 이마를 짚었다. 강아지는 살이 쪄 털가죽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 어지간히 먹는 거 밝히는 놈인가 보다. 털은 왜 그 모양이니? 나는 강아지의 코에 있는 점을 보고야 알았다. 그 놈은 이 주일 전에 사라진 내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나는 강아지를 목욕시켜 옆자리에 태우고 차를 몰았다. 양수리에 가서 물이나 실컷 보고 올 참이었다. 너는 그 동안 어디 갔었니? 물어도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강아지. 물어도 외면하고 딴 짓을 하는 강아지를 옆자리에 태우고 물가에 가서 눈 낚시나 할 작정이었다.

죽는 날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면 이 주일쯤 서로 애를 태우면 어떠랴. 이 주일쯤 서로 잊고 있으면 또 어떠랴. 강아지는 끝내 집을 잊지 않았고 집을 지키는 나를 잊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돌아갈 집은 있지만 어디 갔다 왔니? 물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어디 갔다 왔니? 그 대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너 어떻게 살았니?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들 생이 너무나 짧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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