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러시아와 오랜 애증의 관계다. 1917년 독립할 때까지 100년 이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2차대전 때는 구(舊)소련의 침공에 맞서 두 차례 전쟁을 치르다가 적잖은 영토를 빼앗겼다. 핀란드는 그러나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 대신 소련과 동구권에 의존했고, 소련은 최대 교역국으로서 핀란드 내정에 지속적으로 간섭했다. 이런 까닭에 소련 붕괴 후 핀란드는 1990년대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지만, 정보통신(IT) 중심의 과감한 산업구조조정으로 자립해 3대 신용평가사 모두에서 최고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러나 핀란드 경제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다시금 강화되고 있다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9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하다는 핀란드의 경제 사정이 그 배경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제지업 등 주력산업 쇠퇴 등 악재가 겹치더니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책임지던 간판기업 노키아까지 몰락했다. IT산업 중심도시 울루의 실업률이 16%대로 치솟는 등 몸살을 앓는 핀란드 경제에 러시아 자본이 전방위로 파고들고 있다.
러시아 국영기업들이 핀란드 주요 기업을 잇따라 인수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러시아 유나이티드조선은 28일 핀란드의 쇄빙선 전문 제조업체인 아크테크헬싱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러시아 원전업체 로사톰은 경영난을 겪는 핀란드 에너지기업 펜노보이마의 지분 3분의 1을 인수해 원자력발전소 운영권을 넘겨받기로 했다.
러시아는 또 경제위기에 빠진 유럽을 대신해 핀란드 기업의 주요 판로가 되고 있다. 1~8월 유럽연합(EU)에 대한 핀란드의 수출액은 전년보다 4% 감소한 반면, 1~7월 대러시아 수출액은 전년보다 1% 증가했다.
관광업계에도 러시아의 입김이 세졌다. 지난해 핀란드 비자를 발급받은 러시아인은 핀란드 인구(520만명)의 25%에 달하는 130만명이었다. 관광객이 늘자 핀란드 정부는 러시아 남부와 중부, 북부 시베리아에 비자 발급 사무소를 증설했다. 러시아 이민도 급속히 늘고 있어 2050년에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스웨덴어를 앞질러 핀란드 제2의 언어가 될 것이라고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핀란드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를 공용어로 쓰는데 스웨덴어 사용 인구는 6% 정도다.
러시아의 경제적 지분이 늘수록 핀란드 국민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자국 명문 아이스하키팀인 조커릿이 최근 러시아 재벌 컨소시엄에 매각돼 내년부터 러시아 프로리그에서 뛰게 된 일이 반(反)러시아 정서를 더욱 자극했다. FT는 "핀란드는 노년층을 중심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과의 전쟁, 소련 붕괴 후의 경제위기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 여전하다"며 "러시아와 국경 1,340㎞를 맞대고 있다는 점이 핀란드에서 징병제가 유지되는 주요 이유"라고 전했다.
핀란드 정부는 그러나 러시아의 투자가 경기회복에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르키 카타이넨 총리는 "러시아가 경제적 장악력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다면 우리에겐 무척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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