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의혹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역공을 취하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국가안보국(NSA) 국장 겸 사이버사령관인 키스 알렉산더 대장과, 국가정보국(DNI)의 제임스 클래퍼 국장. 두 사람은 29일(현지시간)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장에 출석해 그간 제기된 의혹을 반박하고 역으로 유럽의 미국 사찰을 폭로했다. 정보기관 보호막을 거두려는 백악관에게 불리한 사실도 동시다발적으로 공개됐다.
알렉산더 대장은 "유럽에서 제기된 자국민 전화 도청 의혹은 완벽한 날조"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이 획득한 정보를 공유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7,000만 프랑스 국민과 6,000만 스페인 국민의 전화 도청도 NSA가 아니라 두 나라 정보기관들이 한 것이며, 취득한 정보는 전화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전화로 자국민 도청을 항의하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해당 정보를 프랑스가 제공했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래퍼 국장은 "유럽 지도자들은 자국 정보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두 사람은 외국 수반을 도청하는 것이 정보기관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클래퍼 국장은 "내가 정보기관에서 일한 50년 동안 해외 정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수집, 분석하는 게 기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963년 정보학교에서 처음 배운 것도 이것(외국 지도자 감시)"이라며 "미국의 동맹들도 미국에서 첩보 활동을 하며 유럽 국가들은 미국 지도자의 대화까지 엿들으려 한다"고 반격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영화 '카사블랑카'를 떠올리게 한다"며 '세상에 여기서 도박이 벌어지다니'라는 영화 대사를 인용했다.
두 사람 외에 정보기관 전현직 인사들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전화가 NSA에 도청당한 사실이 알려진 뒤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독일을 향해 경고장을 날렸다. 이들은 독일 연방정보부(BND)가 2008년 미국 측에 미국 시민 300명의 전화번호를 잘못 제공한 사실을 공개하고 독일이 미국에서 미국 시민을 도청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28일 한국이 미국의 첨단 군사 기술을 빼내가고 있다는 폭로기사를 보도한 것도 미국의 반격이란 해석이 나온다.
정보기관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보다 제한하려는 백악관에도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들은 백악관과 국무부가 우방국 지도자의 전화도청을 허가했다고 주장해 백악관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클래퍼 국장은 오바마 대통령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백악관이 해외 정상 도청 사실을 인지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화가 난 정보기관들이 입을 열어 폭로 정국이 조성되면 미국 정치권과 국제관계가 한동안 격랑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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