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 작업실의 잠 설치던 밤미술관에 예민하게 옮겨심어석쇠·쇠막대·선인장 엮은 방범창·스펀지 타자기로 벽에 쓴 글귀 등취객·우는 아기·생선장수 목청 기록허접한 외관과 원시적 기능으로명징한 전달력 성취하기를 꿈꿔
2010년 여름 이태원 시장 골목을 지나던 이들은 길 끝 연립주택 2층 창에 설치된 기묘한 철조망을 보았다. 전문가가 만든 두려워할 만한 철조망이 아니라 버려진 쇠막대와 김 굽는 석쇠, 선인장 따위를 엮어 놓은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방범력에 할 말을 잃을 때쯤 물체를 엮어 놓은 방식이 제법 용의주도함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은 나사로 조이고 어떤 것은 못으로 박아놔서 스패너를 들고 온 침입자는 드라이버를 가지러 가야 할 것이고 드라이버를 가져온 이는 스패너가 없어 쩔쩔매게 될 것이다.
궁상맞다고 하기엔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다고 하기엔 지독하게 예민한 이 집의 주인은 설치작가 이주요(42)다. 작가가 2008년 겨울부터 2011년까지 이태원 집에서 살며 쓰던 집기는 26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 옮겨져 전시 중이다.
"제 작품은 전시용으로 만든 게 아니라서 전시장으로 옮겨 놓으면 정말 허접스럽기 짝이 없어요."
29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대인기피증을 앓는 예술가도, 소비 시대를 비판하는 반문명주의자도 아니었다. 웃음이 잦은 그는 부서질 듯이 작고 말랐는데 자신이 만든 임시변통의 집기들처럼 가볍고 불확실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작았고 자주 아팠어요. 작음과 약함이 제 정체성이에요."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신체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작가 레지던시에 거주했던 20대 때는 건조함을 못 이겨 수건과 대야로 가습기를 만들었고, 30대 초반에 작업한 드로잉집 'Two'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이용해 신체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포즈 드로잉들을 담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찬 손을 덥힌다든가, 엎드려 누운 사람 위에 다른 사람이 올라앉아 서로 등허리와 엉덩이의 마사지 효과를 누리는 식이다.
"영국에서 3년간 살 때 룸메이트와 이러고 있었다"는 그는 20대 때부터 전시 요청을 좇아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때마다 부딪힌 물리적 환경들은 약하고 예민한 작가에게 거대한 도전이었고 그는 그것들에 반응하고 싸우는 과정을 기록해 작품으로 전환했다.
내년 1월 12일까지 하는 이번 전시는 이태원 시장길 연립주택에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올해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전시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시장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었어요. 밤에 가게들이 셔터를 닫으면 완전히 깜깜해지는데 그 길을 지날 땐 아저씨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 됐어요. 지역 토박이들 사이에서 전 완전히 이방인이었으니까요."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치던 작가는 방범창을 엮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이사올 즈음 태어난 앞집 아기가 새벽마다 울어 젖혔기 때문이다. 아침이 돼서 겨우 아기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생선 장수가 찾아왔다. 육성으로 "갈치와 고등어요"를 외치는 그 소리는 오페라처럼 우렁우렁 골목을 울렸다.
낯선 환경의 물리적 공격 속에서 화내고 웃고 겁내고 불편해하던 작가는 이 모든 일을 직접 만든 타자기로 벽에 기록했다. '2시 4시 7시'는 매일 새벽 앞집 아기가 우는 시간, '고래고래고래고래'는 생선 장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쓴 것이다. 긴 나무 막대 위에 스펀지 스탬프를 장착한 원시적 형태의 타자기는 뒤로 힘차게 당겼다가 놓으면 벽에 글씨를 찍는 방식인데 스펀지에 새긴 글귀 외에는 쓸 수 없다.
재미있는 점은 여러 개의 타자기가 각각 그 용도에 맞게 작동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벽에 쓰인 글 중 '큰 흑인, 작은 흑인'은 작가의 집 앞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깊은 밤 한 행인이 흑인 2명에게 얻어 맞았는데 다음날 경찰 조사에서 동네 주민들이 일제히 가해자를 감싸는 내용이다. 이 일을 기록하는 타자기는 나무 막대 아래 돌이 매달려 있다. 돌을 발로 세게 걷어차면 벽에 사건의 전말이 '꽝'하고 찍힌다. 이른바 분노와 고발의 타자기다.
반면 연애편지용 타자기는 작고 은밀하다. 손을 나무 상자 안에 숨긴 채 여린 손목을 요리조리 돌려 판자에 글씨를 찍도록 돼 있는데, 정작 여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결국 스탬프를 달지 못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작가가 가리킨 판자는 스탬프를 꽂지 않은 철사에 찍혀 여기저기 찢기고 검은 잉크가 어지럽게 묻어 있었다.
허술한 외관과 원시적 기능으로 성취하는 명징한 전달력은, 이주요가 꿈꾸는 미술 그 자체다. "제가 생각하는 미술은 명작을 만든다거나 어떤 사상을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사적인 삶에 대한 레퍼런스를 글이 아닌 이미지로 남기고 그?다른 사람과 함께 지켜보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이화여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영국 첼시미술대를 졸업한 그는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고 2010년에는 1억원의 상금을 걸고 전세계 작가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양현미술상의 첫 한국인 수상자가 됐다.
박스 2개로 하나는 선반, 하나는 탁자를 만들어 쓰다가 떠날 때 탁 접어서 버리고 간다는 그는 곧 또다시 뉴욕으로 떠난다. 벽에는 타자기로 쓴 '5년 동안 약간의 행운이 따른다면'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소장도 판매도 애매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조금만 더 세상을 관찰하고 싶은 바람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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