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놓인 크레용 상자에 투명한 가을햇살이 쏟아진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흥얼흥얼 알 수 없는 멜로디를 따라 빨강 파랑 주황색 크레용이 번갈아 도화지 위로 미끄러졌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도화지 위에는 얼룩무늬 코끼리와 빨간 말, 의자에 앉은 노랑 여우가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크레용을 움켜쥔 소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규칙적으로 늘어선 온갖 동물들을 풍부한 색감으로 표현한 소년의 작품은 가방과 공책 등 생활용품 디자인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열 다섯 소년 현집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디자인 작가다. 현집이는 '자폐'로 더 잘 알려진 발달장애 1급 지체장애인이다.
지난 25일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장애인 특수교육기관 홀트학교에서 JW중외그룹이 후원하는 '홀트미술꿈나무멘토링'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을 만났다. 올해 마지막 수업이 열리는 중이었다. 현집이를 비롯해 비슷한 장애를 지닌 여섯 명의 학생들은 최문희(홍익대 디자인영상학부), 공미숙(강릉원주대 서양화과)교수의 지도에 따라 저마다의 작품세계로 빠져 들었다. 평소 간단한 의사소통은커녕 눈을 마주치는 것 조차 힘겨운 장애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림을 향한 학생들의 열정과 집중력은 놀라웠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쳐다보다가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눈빛이 살아났고 자신의 색깔을 가득 담을 때까지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교실 한쪽에서 막내 혁(10)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대화하던 멘토 최문희 교수와 볼을 비벼댔다. 최 교수는"처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아 지도교사를 통해서만 대화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관심을 얻으려 한다"며 대견해 했다. 일반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또래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했던 혁이는 이 학교로 전학 온 후 숨어있던 재능을 찾았고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성격도 훨씬 밝아졌다. 어려서부터 혼자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행복했다는 맏언니 은경(18)이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작품만으로는 장애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패턴 분야에 재능이 뛰어난 은경이는 지난해 교내에서 연 전시회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고3인 은경이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홀트학교의 김솔 미술교사는 "장애인은 장애 유형에 따라 특별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며 "재능을 발굴하고 지원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학령에 따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다면 더욱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시작부터 프로그램을 이끌어 온 최 교수도 "개인과 단체의 재능기부 문화가 확대되어 장애인 교육프로그램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 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생님, 내년에는 더 예쁘게 그려 드릴께요." 학생들은 두 멘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올해 마지막 수업을 아쉬워했다. 올 3월부터 8개월에 걸쳐 멘토와 멘티가 함께 그려온 작품 20여 점은 다음달 4일까지 서울 대학로 홍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특별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김주영기자 will@hk.co.kr
사진부 기획팀=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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