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주요 국가 정상 35명에 대한 통화 도청 의혹 등과 관련해 나라 안팎의 비난 여론이 거세다.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에 항의의 뜻을 전했고,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도 취소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측에 도청에 대한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외국 정상에 대한 도청은 상식 밖의 비윤리적 행위로 주권 침해에도 해당한다. 저자세로 일관할 게 아니라 엄중한 항의와 재발 방지를 요구할 당위성이 분명히 있다.
▲ 하지만 국가간 무한경쟁 시대에 신사도에 입각한 부당성 주장에만 그친다면 우린 늘 당할 수 밖에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비록 미국이 여론에 밀려 정보수집에 대한 개선책 마련을 시사했지만, 불법적인 방법이 근절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국제 무대에서 정보력은 생존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 등 다른 강국들도 도청이나 해킹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향후 미국의 첩보전이 더욱 교묘해지거나 한층 첨단화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 첨단기술을 활용한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은 뿌리가 깊다. 우리와도 악연이 있다. 1976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 당시 미국 CIA가 청와대를 도청해 정부와 박동선씨의 연결고리를 알아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국대사도 도청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후 양국 관계를 고려해 이 문제는 유야무야 됐다. 당시 정부의 대응이라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도청 방지 연구에 들어간 것과 청와대 창문을 3중으로 겹겹이 세운 것뿐이었다.
▲ 현재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도청 우려에 따라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어떤 식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보를 빼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공작정치가 횡행하던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요 현안에선 필담을 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이 필담으로 회의를 하거나 음어, 암호를 사용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국가정보원이 댓글이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염영남 논설위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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