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꼬일 대로 꼬여 있다.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과 검찰 내분 사태, 감사원장 검찰총장 등의 편향 인사 문제까지 현안마다 여야 간 양보없는 비판과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정치의 작동이 멈춰버린 형국이다. 여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만 좇다'청와대 2중대'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됐고, 야당은 박 대통령 등에 대한 공세 수위만 높일 뿐 탈출구를 찾지 못해 전략 부재 정당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련 교착 상태를 단번에 해결하며 정국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 열쇠는 물론 박 대통령이 쥐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달 박 대통령이 여야 대표와 가진 3자 회담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유감 표명과 진상 규명, 재발 방지 등을 언급했다면 정치는 진작 정상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대선 때 국정원 덕 보지 않았다"는 입장, 그러니 사과할 필요 없다는 자신만의 원칙에 집착했고, 그로 인해 한달여 이상 정치 부재가 이어졌다.
그것이 범인의 생각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대통령의 판단과 결정이기에 염려를 놓을 수 없다. 대통령이라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절반의 국민도 고려하는 통합의 리더십, 자신의 소신과 원칙보다는 국가와 국민 전체에 미칠 영향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유연한 리더십, 상식 밖의 비난과 요구라도 통 크게 받아 넘기는 대범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하지만 취임 첫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박 대통령은 야당을 파트너로 보지 않는 대결의 리더십, 자신의 소신과 원칙에만 매달리고 반대 진영의 비난을 참지 못하는 경직된 리더십만 보여주고 있다. 이래선 박 대통령도, 여야 정치권도 모두 상처투성이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구도에선 결코 승자가 나오지 못한다.
박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리더십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총대를 메야 한다. 권력 구도라는 상황적 요소와 연륜, 경력, 지위, 대통령 신임도 등 개인적 요소를 감안할 때 적임은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우선 자신에 대해 '기춘 대원군'같은 힐난이 더는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김 실장은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양복을 입고 안방에서 2층 서재로 정시에 출근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만큼 자기 관리, 자기 절제가 뛰어나고 격식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겠다는 결심만 한다면 그가 모든 고위직 인사에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청와대인사위원장을 맡지 않거나 아니면 위원장으로서 고위직 인사가 투명하고 객관적인 절차와 기준에 따라 시스템적으로 처리되도록 하면 그만이다.
더 큰 전제는 그가 박 대통령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유신헌법의 기초를 세운 인사다. 또 오랜 기간 박 대통령에게 조언을 해온 7인회 멤버다. 박 대통령의 그 유명한 '레이저빔'도 견디며 얼마든지 박 대통령의 뜻과 다른 직언과 고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법률가로서 박 대통령의 원칙 코드와 잘 맞기도 하겠지만 국회의원 경험을 살려 정무적 감각까지 발휘한다면 직언과 고언의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당장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직접 사과 표명이라는 야당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서 정국을 정상화시키도록 박 대통령을 설득하는게 급하다. 그것이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것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그러나 김 실장이, 그의 언급대로, '윗분'의 뜻을 받들기만 하는 '승지'역할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론 계속 장막 뒤의 권력자로 지내려 한다면 대원군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김 실장에 대한 의심과 의문과 의혹이 깊어질수록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계속 흠집이 날 것이다. 천하의 대원군, 아니 윗분의 뜻만 받드는 승지라 해도 국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더구나 그로 인해 권력에 생채기가 날 상황이라면, 나라와 국왕을 위해 목숨 걸고 바른 소리를 하는 간관(諫官)이 되어야 하는 것이 도리다.
황상진 편집국 부국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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