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노벨문학상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15년 만에 찾아온 10월 태풍이 우리나라를 비켜간 것은 참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게 맞이하고 싶었던 노벨문학상이 비켜간 것은 못내 아쉽고 안타깝군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을 받았다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텐데, 그도 상을 받지 못했으니 됐다는 심사로 속을 푼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번역에 종사하기 때문에 번역과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번역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지적이지요. '번역가'로 살고 있는 자로서 몇 마디 견해를 밝히는 것도 도리가 아닐까 싶군요.

1968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는 "이 상의 절반은 번역가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씨의 몫"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금의 절반을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이 미국인은 1947년에 외교관으로 일본에 왔다가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가와바타 외에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미시마 유키오 등 당대의 최고 문인들과 교유하는 한편, 그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고, 덕분에 세 작가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 그의 작품을 주로 번역한 사람은 존 베스터(영국인)와 존 네이선(미국인)인데, 특히 네이선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대학 일문과를 정식으로 수료한 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일본문학자입니다. 그는 오에가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으로 갈 때 수행해서 시상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는 어떤가.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그의 작품은 46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놀랍게도 유럽의 변두리 언어인 바스크어와 페로어로도 번역되어 있더군요). 특히 중요한 영어 번역의 경우 그의 소설을 주로 번역한 사람은 필립 게이브리얼(애리조나대학 교수)과 제이 루빈(하버드대학 교수)인데, 이들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일본문학자일 뿐만 아니라, 노벨문학상 후보자를 추천하는 데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10여 년 전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중견 소설가가 우편물을 보내왔는데, 그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원고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탁인즉, 한번 읽어보고 번역이 어떤지 검토해달라는 것. 내 독후감은 이랬습니다. 1만 단어 수준의 작품을 2, 3천 단어 수준으로 '반역'했다는 것. 그래서 그에게 전화로 말했지요. "선생님 소설이 청소년물로 둔갑했더군요." 나중에 전해 들었는데, "외국에서 읽기 쉽게 하려고 그렇게 수준을 낮추었다"고 번역자가 변명하더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해되는 면이 없지도 않지만, 그렇게 번역된 책을 그곳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그 후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등의 활동으로 형편이 좀 나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은 필경 위의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이런 곳에서 지원하는 번역 사업을 보면 한국인과 외국인의 조합으로 공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과 외국어에 서툰 한국인의 결합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행여 '이인삼각'의 절름발이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노벨문학상과 관련하여 번역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세타령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반도체 팔고 선박 팔고 자동차 팔아 경제력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문화적으로도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1년에 시나 소설을 몇 권이나 사서 읽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국내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문학이 해외에서 대접받을 수 없음은 자명한 노릇이 아닐까요.

김석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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