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민주통합당 의원 시절 메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송 전 장관이 북핵 문제 등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더니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정권이 바뀌어 정부 밖에 나오면 좌절감도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현 정부 정책을 주로 비판하는 시각에서만 보게 되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만 볼 건 아닌 것 같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말이 탐탁지 않았지만 두고두고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송 전 장관의 저서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이 책에서 33년 외교관 생활을 접고 국회에 들어와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실의 한쪽만을 보거나 사실 자체가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더라는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이익의 조화와 조정을 업으로 하는 협상가가 당파적 이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의 장에서 능히 느꼈을 법한 좌절감이라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을 둘러싼 여야의 정쟁을 보자면 진실을 온전히 전하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새누리당만 보더라도 인터넷 댓글이나 트위터로 대선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투다. 야당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툭 하면 대선 불복으로 걸고 넘어진다. 지난 대선에서 벌어진 관권 개입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얼마나 큰 오점을 남기고 있는지 말하는 이를 여권에서 본 적이 없다.
선거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험한 세월을 헤쳐온 이 나라가 지금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단순히 경제적 뒷받침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만 전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국정감사장에서 외압 의혹을 폭로한 윤석렬 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은 '선거사범 중 유례 없는 중요한 중범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검사가 국감장에서 이 정도로까지 말할 정도면 단지 검사 개인의 공명심으로 볼 일이 아닐 터인데 여권은 그를 '소영웅주의에 빠진 정치검사'로 치부했다. 그가 이 예민한 사건을 부풀려 얻을 정치적 실익이나 미래의 이득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과도한 낙인이다. 여당 후보 지지와 야당 후보 지지로 분류된 5만여 건의 트윗 가운데 일부 내용들이 야당 후보 반대나 여당 후보 지지로 볼 수 있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이를 두고 중대 하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20만 건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5만 건도 빙산의 일부다.
여당의 방어적 자세는 정통성 훼손 우려에 기인한 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진실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데 따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의 일부를 들어 전체인양 말하는 것이야 말로 왜곡이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5만여 건의 트윗은 물론이고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 등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이제 법원의 판단이 시작되는 판인데 "선거결과 승복 여부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느니 하며 야당 일부에서 대선 불복 심리를 드러내는 것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송 전 장관은 서문에서 "진실의 일부만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보다 나쁘다"고 했는데 거짓말보다 못한 진실의 성찬이 정치권 사방 천지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석에서 만난 한 서울고법 판사는 축소와 과대 포장으로 얼룩진 내용들이 정국을 어지럽히는 게 지겹고 괴로운지 하루 빨리 법원에서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거짓말보다 못한 진실의 일부를 매일 듣고 봐야 하는 국민의 심정도 그러할 것이다.
정진황 정치부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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