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의상은 제2의 주인공으로 불리기도 한다. 의상 디자인이 무대 구성의 중요 요소로 진화한 현대극을 설명함에 있어 '잘 만든 의상 한 벌이 배우 열 명보다 낫다'는 표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특히 민간 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대형 유명 뮤지컬에서 의상의 화려함이나 패션 감각은 오페라 등 다른 무대 공연들을 크게 압도한다. 상대적으로 예산이 부족한 오페라 의상 제작은 주로 역사적 고증에 치중하지만 뮤지컬의 경우 고증과 함께 다양한 전위적인 시도들을 해볼 수 있어서다. 뮤지컬 '위키드'의 의상 디자이너인 안현주씨는 "오페라 의상 제작은 정답이 뚜렷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라면 뮤지컬 의상은 '논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표현했다.
11월 22일 서울 잠실 샤롯데씨어터에서 오픈런으로 개막하는 뮤지컬 '위키드' 한국어 버전 공연팀이 28일 무대 연습을 시작하면서 배우들이 입게 될 드레스, 신발, 모자, 가발 등을 공개했다. '위키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가운데 '오페라의 유령'과 더불어 무대의상이 가장 화려하고 비싼 작품으로 꼽힌다.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를 뒤집은 뮤지컬로 영국 패션사에 정점을 찍었던 에드워드 7세 시대(1900년대 초) 의상 콘셉트를 기반으로 해 여성성을 한껏 강조한 보석 장식과 비즈들로 수놓은 드레스들, 녹색 바탕의 날씬한 복장들이 관객의 시선을 잡는다.
모리블 학장(김영주)의 의상은 실크 벨로아라는 원단에 금색 자수를 하나하나 붙여 만들었다. 초록 마녀 엘파바(옥주현, 박혜나)의 옷은 치마 부분만 360겹으로 이뤄졌으며, 36쪽의 날개 모양 천을 이어 붙인 글린다(정선아, 김보경) 드레스는 국내에서 무려 5개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녹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앙상블 배우 20여명의 의상도 각각 제작 기간이 한 달이나 걸릴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번 공연에 쓰이는 의상과 장신구 소품은 배우 36명이 입게 될 총 350여 벌의 드레스와 옷, 가발 80벌, 350켤레의 신발 등이다. 성인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보관용 컨테이너 23개를 가득 채울 정도의 분량이다. '위키드' 월드와이드 협력 의상디자이너인 빌리 로치는 "인건비와 원단 가격 등을 포함해 의상마다 평균 3,000만원, 총 40여억원 가량이 의상 제작비로 들어갔다"며 "가장 비싼 의상은 금박과 깃털이 들어간 모리블 학장의 옷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의상 제작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이유는 수작업을 고집한 공정, 원작자와의 철저한 아이디어 공유 과정, 그리고 각 의상에 가미된 눈부신 자수와 레이어드(겹치기) 등 때문이라고 디자이너들은 설명한다. 이 의상들은 대부분 재활용이 불가하다. 배우들의 신체 사이즈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전 공연에서 사용된 의상이 다시 쓰이지 않는다. 여기에 주인공 배역들이 더블 캐스팅된 것도 의상 제작비를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 안현주씨는 "의상을 제작하기 전 원단은 어느 나라에서 구입할지, 디자인 수정은 어떻게 할지를 원작자에게 제안해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친다"며 "연기하기 쉽도록 계속 옷을 수선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상승한다"고 말했다. 로치씨는 "한국, 미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옷을 만들었고 원단은 대부분 한국에서 구입해 제작했다"며 "이같이 꼼꼼히 공을 들이다 보니 다른 공연들의 경우 3개월 정도 걸리는 (의상 제작) 시간이 6개월까지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무대 연습 시작과 함께 제작이 일단 완료된 의상들도 개막 전까지 계속해서 수선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상대역을 공중으로 들어올려야 하는 배우 의상의 소매를 손보거나 무대에서 신어보니 불편한 구두를 새로 제작하는 일들이다. 몸에 꼭 맞게 만들어진 옷들이라 배우들이 연습 기간 살이 찐다면 낭패일 수 있다. 로치씨는 "약간의 여유분을 옷 안에 만들어놔 이런 경우 쉽게 고칠 수 있다"며 "한국 배우들은 너무 소식하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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