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살풀이 80'으로 유명 뒤틀린 한국사회를 춤으로 응시작년 중앙대 교수직 정년퇴임 '몸-Life 학교'서 새로운 꿈 꿔 "12월 맨발의 이사도라 공연"'댄싱 9' 출연 큰딸 루다 현대발레에 개성적 서사 접목 눈길 "신체적 한계 나만의 발레로 승부"현대무용 전공 둘째딸 루마 "언니·어머니와 무대 서고 싶어"
"미쳐버릴까/ (그래, 미쳐버리렴) / 거리에는 장례차가 지나가고 /난 머리 풀고 (하략)"시인은 긴 머리채 휘두르며 막힌 시대 한 가운데를 헤쳐가는 그녀의 몸짓을 그렇게 노래했다( 문학과지성사 발행, 김영태의 1986년 시집 중 '테이블 위의 화분 하나' 에서).
그가 산발한 채 밖으로 나간 것은 필연이었다. 1984년 이래 안성의 중앙대 캠퍼스 교정,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여의도 광장, 임진각, 뉴욕 센트럴파크 등을 무대로 춤 추던 그는 10년 째가 되던 1993년은 청와대 앞길까지 무대로 삼았다. 사회적 함의가 아니라 보다 내면적인 부름, 자유의 몸짓을 그렇게 표현했다. 행여 비라도 오는 날이면 시민들은 우산을 받쳐들고 그의 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춤은 일상 자체가 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몸_Life 학교'. 건물 밖 (사)한국현대춤연구회 이름의 간판 아래 발레, 힐링 댄스, 현대 무용, 방송 댄스 등 수업 내용이 씌어져 있다. 바로 옆, "bones for life"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무용이라는 예술을 두고 생명을 위한 "뼈대"라니. 현대 무용가 이정희(68)씨가 같은 길을 걷는 두 딸과 함께 시대의 화두, '몸'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발레리나 이루다(28), 수업 중인 이루마(23ㆍ한국예술종합학교 현대무용 4) 등 두 딸은 연습실의 바(bar)에 체중을 싣고 또 다른 비상을 꿈꾼다.
루다씨는 요즘 이름 값깨나 하는 유명인이다. 춤에 관한 범 사회적 관심을 입증하는 케이블 TV M-net의 서바이벌 게임 프로 '댄싱 9'의 인기 출연자다. 지난해 뉴욕서 열린 '쿨 뉴욕 댄스 페스티벌'에 개인 안무작으로 참가하고 지난 5월 귀국한 뒤 숨 돌릴 겨를 없다. 내친 김에 11월 1~3일 블루스퀘어에서 열리는 댄스 갈라쇼 '댄싱 9'까지 출연한다. 거기서 뮤지컬 '시카고'에서 착안한 발레 'All That Jazz'를 선 보이는 것은 물론, 내년 1월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올릴 신작도 구상해야 한다.
인터뷰 짬도 겨우 냈다. "컨템퍼러리, 모던 발레리나로서 '댄싱 9'에 출연하는 사람으론 내가 유일해요, 그 밖에는 다들 현대 무용 아니면 길거리 댄스(street dance)이니까요."딸의 말을 어머니가 받았다. "(루다는) 정통 클래식 발레를 공부했지만 다양한 장르를 지향해 모던 댄스, 비보잉까지 하는 '댄싱 9'은 제격이죠."방송 나가기 전인 지난 6월, 홈페이지(www.blacktoe.kr)까지 구축한 딸이 "현대 발레를 소재로 개성적인 서사를 구축해 현실화하는 드문 시도를 해 냈다"는 어머니의 자부다.
현대의 예술은 전통적 미의식에 내재된 위선을 철저히 배격한다. 1m는 넘는 긴 생머리를 철렁대며 도시 사람들에게 잊어버린 꿈을 상기시켜 온 어머니는 이 집안의 구심체다. 연하의 남편 이동현(63)씨까지 본업이었던 감독 일을 거두고 영상으로 이 세 여인을 뒷받침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니.
그는 2003년 안재욱이 주연한 영화 '하늘정원' 이후 메가폰을 놓은 뒤로, 세 모녀의 무용에 관한 사진이라면 무엇이든 도맡아 한다. 'Film, Video & Dance' 등 독특한 영상 작품이 그래서 나왔다. 1980년 국내 최초로 '춤과 비디오의 만남'이라는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이들은 4년 뒤 결혼, 영원한 동지로서의 노선을 걷고 있다.
바깥에서 얼핏 보기에 이들간의 유대는 유별나다. 루다는 이 씨 나이 마흔에, 루마는 마흔 다섯에 가족의 성원으로 편입됐다. 이룸(成)이란 말을 순 한글로 변주한 두 딸의 이름에는 늦둥이들에 대한 지극정성의 바램이 배어 있는 것이다. "춤에 미쳐 늦은 나이에 결혼해 얻은 자식인 만큼, 각자의 꿈은 꼭 이루라는 염원이죠."
2010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의 'Two Chains'에서는 이씨가 뒷면에서 크게 투영되는 빔 프로젝터의 화면을 배경으로 춤을 췄다. 벽에 임신중의 초음파 영상이 투사되는 가운데 어린 딸이 무용하는 엄마를 따라온다는 줄거리로 인연의 힘을 그렸다. 이어 2011년 '아르코 솔리스트 공연' 중 'Be Twin'에서 이씨는 두 딸의 어릴 적 연습 영상을 배경으로 춤을 췄다. 또 작품'19860130'의 제목은 바로 첫 딸의 생년월일에서 따왔다.
그의 작품과 활동은 그렇듯 자신을 둘러싼 작은 것들과의 약속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지난해 이씨는 30년 동안 몸 담은 중앙대 무용과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했다. 그러나 몸 학교 덕에 더 분주하다. 17년 역사의 이 곳은 원래 분당이 신도시로 막 개발될 때 마침 연습실이 필요해 마련했다. 현재 주변의 어린이 학생을 포함, 20여명이 수강하면서 동네의 명물로 떠올랐다.
그렇다고 자기 일에만 함몰되지도 않는다. 그의 행보는 생활 속의 작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가령 '살풀이' 연작을 통해 그는 무용이라는 작업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사회성을 웅변해 보였다. 광주 민주화항쟁 당시 그는 뉴욕에서 마사 그레이엄과 머스 커닝햄 등 현대 무용의 거장들이 세운 무용 학교에서 공부를 거의 끝내고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그 해 8월 그는 아르코 대극장에서 한국컨템포래리 무용단이 펼쳤던 '살풀이 80'을 안무했다."춤을 추는 사람으로서 당시 내가 할 수 잇는 일이라고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숨져간 사람들의 넋이라도 위로하는 진혼곡 같은 춤을 만드는 일이었다."무용수들이 소복을 입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행위가 펼쳐졌지만 당시 군부의 눈은 무용까지 미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일로 그는 사회성 짙은 안무가라는 평까지 얻게 되고, 한국 사회의 뒤틀린 곳을 향한'살풀이' 시리즈로 화답했다. 장례 문제, 분단 상황까지 기존의 무용이 강 건너 불 보듯 해 온 민감한 테마들은 1992년 '살풀이9'로 일단락됐다. 이후 그의 성가는 1998년 국립무용단이 객원 안무가로는 처음 초청한 현대 무용가라는 사실에서 확인됐다(1998년 '자연인'). 자연미에 대한 그의 오랜 추구는 지금도 1m는 족히 되는 그의 생머리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별명이 '이머리'일 정도로, 그는 긴 모발이 주는 독특한 효과를 무용 언어로 승화시킨 주인공이다.
현재 그는 12월께 자신의 공간에서 올릴 모노드라마 '맨발의 이사도라' 연습에 전력 투구 중이다. 주부 대상의 브런치 공연 형식으로 구상중인 작품은, 구히서씨의 번역본을 사용해 솔로 춤은 물론 영상과 함께 대사도 읊조린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금성이 제일 빛날 때 내 삶도 거침없이 흘러간다." 특히 "내 삶의 두 동기, 사랑과 예술은 끊임없이 싸울 뿐"이라는 대사 앞에서 아직 현역인 원로 댄서는 목이 조금 멘다.
그는 "이제 (정규) 무대에서 춤출 나이는 지난 것 같지만 여전히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을 생각하다 거기에 미쳤다"고 말했다. 여성 해방을 위해 몸 바친 이사도라 던컨의 비극적 최후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작품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마저 비명에 보내고 자신도 스카프에 목이 감겨 죽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최후에 몇 년 동안 거의 강박돼 있었죠."
루다씨도 강박이 있었다. 그는 "예쁘지도 않고 팔등신도 아니어서 수업 시절은 늘 주인공이 못 됐다"며 "그럴수록 나만의 발레를 하겠다는 의지는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그가 토슈즈에 검은 스프레이를 뿌려 만든 'black toe'는 바로 그 의지의 발현으로서, 홈페이지 등을 통해 낯을 익히고 있다.
루마씨의 바램이 야무지다. "어쩌다 보니 언니, 나, 어머니와 함께 한 무대가 없어요. 언젠가는 이루고 싶어요. 아버지의 영상 작업까지 함께 해서". 이씨와 루다, 또는 두 딸이 함께 한 무대뿐이었다니 충분히 나올 법한 이야기다. 루마씨는 그것이 "어머니의 업적에 대한 오마쥬"라고 말했다. 아버지 동현씨가 조금 섭섭하겠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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