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가능성 거의 없다"서 이젠 "가능성 없지 않다" 강조상품 내용·위험성 조목조목계열사 상품 밀어주기 자제직원 성과 평가 방식도 실적보다 완전판매에 방점가장 미온적이던 증권업계, 전담 임원·헌장 발표 움직임
"이 상품은 국공채에 90% 이상을 투자하기 때문에 만기까지만 보유하시면 원금 손실이 날 위험이 적긴 합니다. 그렇다고 100% 원금 보장이 되는 상품은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확실히 아시겠죠?"
최근 주가연계증권(ELS)에 가입하기 위해 증권사 객장을 방문한 직장인 최모(36)씨는 직원들의 달라진 태도에 '동양 사태'의 영향을 실감했다. 전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만 강조하더니 이번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힘줘 설명했다. 비슷한 얘기지만 강조점이 정반대였던 것. 전에는 투자설명서도 상세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형식적으로 설명하고 형광펜으로 표시한 데 사인하도록 요구했으나 이번에는 고객이 상품 내용을 확실히 이해했는지 여러 번 물어보며 확인했다.
무려 5만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동양 사태'를 계기로 금융권에 '소비자 보호'가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당장 실적이 좋더라도 불완전판매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실적주의'를 강조하던 은행과 보험, 증권사들이 '완전판매'를 더 중시하는 쪽으로 성과 평가 방식을 바꾸고 있다. 금융소비자보호 전담 임원을 임명하거나 금융소비자보호 헌장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 금융감독 당국의 '미스터리 쇼핑'과 별도로 사내에서도 미스터리 쇼핑을 실시해 불완전 판매를 예방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있다.
동양 사태, 무리한 '캠페인'이 원인
5만명의 피해자를 낳은 동양 사태의 일차적 원인은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동양증권이라는 금융 계열사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계열사 회사채와 기업어음(CP) 판매를 무리하게 독려하는 회사 차원의 '캠페인'에 있었다. 동양증권은 직원들이 일반적인 주식이나 펀드, 채권을 판매하는 것보다 계열사 채권과 CP를 판매할 때 매월 지점마다 내려 보내는 '약정'을 더 쉽게 채울 수 있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의 약정이란 '수수료 할당'을 말한다. 예를 들어 증권사 영업 직원이 매월 벌어야 하는 약정 수수료가 1,000만원이라면 이를 채우기 위해 고객들로 하여금 매월 수십억원어치의 주식 거래나 상품 가입 등을 유도해야 한다. 올해처럼 장이 안 좋고 증권사들이 어려울수록 주식 거래를 통해 약정을 채우기 힘들어지고, 불완전판매가 일어나기 쉽다.
증권사처럼 약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과 보험을 포함한 대부분 금융사에서는 특정 상품을 집중 판매하는 캠페인이 종종 벌어진다. 같은 금융지주사 내의 보험사가 만든 방카슈랑스 상품, 계열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펀드 상품에 대한 '밀어주기'도 발생한다. 실적주의가 강한 회사에서 직원들이 캠페인 실적을 염두에 두면 고객에게 유리한 상품 보다는 캠페인이 걸린 상품을 판매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완전판매가 이뤄지기 쉽다.
금융사들 소비자보호 체계 강화 움직임
그 동안 금융회사들의 소비자보호 움직임은 이 같은 실적주의나 약정 관행은 그대로 둔 채 소비자보호 기관을 운영하는 수준의 전시성 대책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동양 사태를 계기로 불완전판매가 자칫 금융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금융회사들의 소비자보호 노력이 더 강화되기 시작했다.
은행권은 지난해부터 소비자보호를 핵심성과지표(KPI)에 반영하는 등의 노력을 해 왔고, 금융사 중 대표적인 민원 발생 업종인 보험사도 대형사 중심으로 소비자보호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업황 부진 등의 이유로 가장 미온적이었던 증권사 역시 동양 사태를 계기로 최근 대형사 중심으로 금융소비자 임원 임명, 소비자보호 헌장 발표 등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병건 동부증권 애널리스트는 "수년 간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가 크게 줄었고 판매 관행이 개선됐는데도 동양 사태로 업계 전체의 안정성과 평판이 순식간에 훼손됐다"면서 "금융소비자 보호가 단기 실적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중장기적 영속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다만 "모든 회사에게 민원을 절반으로 줄이라는 등 당국의 기계적인 지침은 오히려 민원이 적었던 회사에게 어려움을 주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소비자보호가 주먹구구가 아닌 합리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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