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유난히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인 연출가 다다 준노스케와 성기웅 작가가 함께 체호프 원작 를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 한국의 상황으로 재창작한 '가모메'가 두산아트센터에서 지난주 막을 내렸다. 4월엔 LG아트센터에서 레프 도진이 '세 자매'를 무대에 올렸다.
26일부터 11월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 연출의 대가인 레프 도진이 "체호프 희곡의 정수"라고 표현한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이성열 극단 '백수광부' 상임연출에게 '바냐 아저씨'는 10년간의 궁리가 빚어낸 결실이다. 1998년 '굿모닝? 체홉'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을 받았던 그는 이후 체호프의 대표작인 '세자매' '벚꽃동산'을 잇달아 연출하면서 "언젠가 '바냐 아저씨'를 올릴 기회를 노려왔다"고 말한다.
세월이 지나 더욱 무르익은 이성열의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가 문장으로 보여준 '여백의 미학'을 무대로 옮겨놨다. 4년째 전남 구례에서 귀농생활을 하고 있는, 영지관리인으로 등장하는 바냐를 똑 닮은 바냐 역의 배우 이상직, 수많은 체호프 연극에 출연했던 원로배우 백성희(마리야 역)와 이지하(소냐 역), 정재은(옐레나 역) 등의 경험이 이성열의 오랜 고민과 어울려 담백한 체호프 드라마를 그려냈다.
4막 2시간 10분 동안 중간휴식 없이 계속되는 '바냐 아저씨'가 보여주는 것은 실패한 지식인들의 헛헛한 인생이다. 조카 소냐, 노모와 함께 매부(한명구)의 시골 영지를 관리하며 살아가는 바냐. 교수직에서 물러난 매부가 젊고 아름다운 새 부인 옐레나를 영지로 데려오면서 바냐의 주변엔 파문이 일어난다. 옐레나를 사랑하게 된 바냐는 매부가 영지를 팔고 도시로 가겠다고 선언하자 폭발한다. 땅을 팔면서 평생의 고생이 의미 없어지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떠나는 상황에 이성을 잃은 바냐가 매부를 향해 총을 쏘지만 이마저 빗나간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중년의 바냐처럼 총알은 맥없이 허공을 가르고, 죽으려 손에 넣은 모르핀도 아스뜨로프(박윤희)에게 빼앗긴다. 인생의 어느 순간 "이게 아니구나!"라는 절망과 함께 유리알처럼 깨져버리는 수많은 삶의 지향점들. 바냐의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에 극을 지켜보는 중년들은 남모르게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운명이 주는 시련을 참으며 살아가요"라고 올리는 소냐의 마지막 기도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객석을 향한 쓸쓸한 독백처럼 들린다. 무대 조명은 바냐와 소냐가 마주앉은 탁자 위 램프와 함께 꺼져버리고 연극은 끝이 난다. '결국 쓸쓸해지는 연극이 되길 바란다'는 연출의 변이 가을 낙엽처럼 가슴에 쌓인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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