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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연의 사이아트/10월 28일] 예술, 믿음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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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연의 사이아트/10월 28일] 예술, 믿음의 과학

입력
2013.10.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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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엔지니어다. 엔지니어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다. 예술가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점은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만들고, 엔지니어는, 글쎄…예술작품은 아니지만 잘 만들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불릴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필자는 엔지니어로서 40년 가까이 일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예술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멋있는 것을 만들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오래 전에 만들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들은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우주여행을 한다는 주제로 만든 짧은 입체영상이다. 이 입체영상은 모 과학관의 요청으로, 과학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우주여행을 간접 체험하도록 제작한 것이다. 영상제작을 마치고 사운드를 입히는 과정에서 고민거리가 생겼다. 우주선 발사에 가장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은 카운트다운이다. 이걸 한국어로 "열, 아홉, … 셋, 둘, 하나"로 해야 하나? 아니면 영화에서 흔히 보았듯이 "쓰리, 투, 원"으로 해야 하나? 우리나라 우주선이니 당연히 한국어로 사운드를 입혔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거다. 우리나라에서 우주선을 발사한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하늘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고라고 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어로 바꿨다. "텐, 나인, … 쓰리, 투, 원, 제로". 그리고 "리프트 오프!" 우주선은 굉음과 함께 하늘로 향해 멋있게 솟아 올랐다.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가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상황이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필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고 영화도 보며 꿈을 키웠다.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외계인과 친구가 되거나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우주를 탐험하고 지구를 구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백인, 미국인들이었다. 가끔 한국인은 아니더라도 동양인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조연급도 아닌 극히 제한적인 역할에 머무른다.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서 우주탐험에 관한 한 그 주역은 서양인일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연히 서양인이어야 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 우리 기성세대는 그렇다 치고, 다음 세대들에게는 우리도 우주탐험에 파이오니어가 될 수 있고,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불어 넣어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후, 우주를 소재로 하는 어린이 뮤지컬도 제작했고, 우주를 주제로 하는 미디어아트 전시도 두 차례 기획했다. 내 전공은 우주항공과는 거리가 먼 컴퓨터공학이지만 대중강연할 때는 반드시 우주에 관련된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한다.

질문. 다음 중 길이가 가장 긴 것은? 1번,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 2번, 지표면에서 해저의 가장 깊은 곳까지 거리. 3번, 지구에서 우주까지 거리. 대다수 사람들은 3번을 택한다. 그 다음으로는 2번이다. 그런데 정답은 1번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00㎞가 넘는다. 지표면에서 바닷속 가장 깊은 곳까지는 대략 10㎞이니 지표면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의 거리와 엇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지구에서 우주까지의 거리는 사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디까지가 지구이고 어디서부터가 우주인지 정의하기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의를 가져 오든지 공기가 전혀 없고 지구의 여러 가지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곳을 우주라고 본다면 대충 100㎞ 바깥에서부터 우주가 시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략 서울에서 세종시 정도 거리를 수직으로 올라가면 우주에 도달할 정도로 우주는 가까이 있다. 그리고 우주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거리에 있다. 그곳에 가는 것은 단지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기술 이전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소설, 미술, 음악, 영화, 연극, 뮤지컬 등과 같은 예술을 통해 생겨나고 공유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예술은 믿음을 만들고 과학은 믿음을 실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 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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