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가안보국(NSA) 도ㆍ감청 의혹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주변국은 물론 우방국에 대한 도청 의혹 폭로가 잇따르는 가운데 외국 지도자 35명의 전화통화를 엿들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동맹국에 대한 무차별적 정보 수집 행태가 드러나면서 미국과 세계 최대 경제블록인 유럽연합(EU)의 관계도 급랭하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청 의혹
영국 일간 가디언은 "NSA가 미국 정부 관료로부터 외국 지도자 35명의 전화번호를 넘겨받아 이들의 통화를 감시해왔다"고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NSA의 감시 프로그램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제공한 기밀문건에 근거한 보도로, 해당 지도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 시절인 2006년 10월 NSA의 신호정보부(SID) 직원들에게 회람된 이 문건에는 NSA가 '고객'이라고 부르는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등 정부기관 고위 관료들에게 보유중인 연락처 목록의 제공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문건에서 NSA는 '최근 사례'로 한 정부 관료가 외국 지도자 35명의 전화번호를 포함, 총 200개의 번호를 제공했다고 언급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공개된 통로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지만 43개는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문건은 밝혔다. 문건은 "SID는 때때로 미국 관료의 개인 연락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다"며 "여기에는 외국 정치ㆍ군사 지도자의 직통전화와 휴대폰 번호 등이 포함된다"고 적었다. 가디언은 문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직접적인 답변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정부가 미국과 우방의 공조 감청에 대한 추가 폭로 가능성을 외국 정보기관에 경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성토하는 EU 정상들
24일부터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당초에는 28개 회원국의 이견을 우려, 의제에서 제외했으나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EU 정상들은 25일 채택한 성명에서 "미국과 EU간 우호 관계는 반드시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는 첩보 분야 업무와 협력에도 해당한다"면서 "신뢰가 없으면 정보 수집 분야에서 필요한 협력에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휴대폰 도청 피해의 당사자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친구끼리는 엿듣지 않으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난항을 겪어 온 EU의 개인정보보호법 강화 방안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유럽의회 시민자유위원회는 앞서 21일 EU 회원국 국민의 개인 정보를 미국으로 전송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의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본회의로 넘겼다. 개정안에 따르면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미국 IT 업체들이 개인 정보를 무단 유출할 경우 최대 1억달러(약 1,452억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5일 "EU 회원국들은 당초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 법안 통과에 주저했지만 이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미국과 EU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마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미국과 유럽의 신뢰가 약해졌다는 것은 EU와 미국의 FTA 협상이 유예돼야 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독일과 브라질 등이 온라인 인권 보호 등을 담은 유엔 결의안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스파이 행위 저지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신정훈기자 h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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