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고산지대를 떠돌아 다닌다는 정체불명의 생명체 예티(yeti). 히말라야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쟁의 신으로 숭앙했다는, 30㎝를 훌쩍 넘는 큰 발에 온몸이 털로 뒤덮여 덩치 큰 유인원을 연상케 한다는 예티는 19세기 이래 히말라야 탐험가들의 목격담으로 서구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1921년 해발 6,400m의 락파라 고개에서 설원을 가로지르는 큰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에베레스트 탐험대장 하워드 베리의 보고가 대표적 사례다.
상상력을 자극받은 예술가들은 소설(에서 예티는 키 4.5m에 흰털로 뒤덮인 원인(猿人)으로 등장한다), 회화(폴란드 화가 스타니슬라브 슈칼스키가 대표적), 영화(올해도 가 개봉됐다), TV드라마, 음악으로 이 미지의 존재를 형상화해왔다. 예티가 테마파크, 장난감, 비디오게임을 통해 전세계 어린이의 친구가 된 것은 물론이다. 북미 삼림지대에 출몰한다는 빅풋, 스코틀랜드 네스호(湖)의 괴수 네시 정도가 예티와 자웅을 겨룰만한 미확인 생명체일 것이다.
예티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기는 과학계도 다르지 않았다. 벨기에 동물학자 베르나르 외벨망은 1955년 '과학적 엄정함'뿐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갖추고 미확인 생물들을 연구하자며 신비동물학(Cryptozoology)을 주창하기도 했다.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판에도 과학자들의 '신비동물' 탐구는 면면히 이어져왔다. 물론 신뢰도 높은 증거 수집 자체가 어려운 터라 예티의 정체에 관한 과학적 논의는 최근까지 가설이나 추측 수준을 넘지 못했다. 1950, 60년대 네팔 팡보체 등지에서 예티의 것이라는 동물 머리가죽이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지만 검증 결과 기존 동물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답보하던 예티 연구는 유전자 연구의 비약적 발전으로 활로를 찾았다. 터럭 한 올로도 DNA 검사를 통해 종(種)을 파악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인간종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고 있는 영국 옥스퍼드대와 스위스 로잔대가 최근 발표한 유전자 검사 결과는 예티 연구의 최신 성과다. 연구팀은 지난해 예티를 비롯한 미확인 동물들의 털이나 조직을 보내달라는 국제적 요청을 했고 그 결과 30여건의 샘플을 수집했다. 이 중 예티 관련 샘플은 2건으로, 히말라야 자락인 인도 라다크와 부탄에서 왔다. 연구는 샘플의 DNA 분석 결과를 기존에 구축된 동물 게놈(유전체)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실험 결과 예티 털의 DNA 구조는 노르웨이 최북단 스발바르에서 발견된 흰곰 턱뼈 화석의 그것과 100% 일치했다. 연구 책임자인 브라이언 사이크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 곰은 4만~12만년 전 살았던 종"이라며 "털의 주인은 이 흰곰의 아종(亞種)인 불곰이거나, 흰곰의 후예와 불곰 사이에 태어난 잡종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사이크스 교수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흥미로운 결과"라고 평했지만, 그 동안 예티가 곰의 일종이라는 추측은 심심찮게 나왔다. 이탈리아의 전설적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도 1986년 쓴 책에서 "히말라야 등반 중 예티와 맞닥뜨렸는데 죽인 뒤 살펴보니까 히말라야 불곰이었다"며 "산을 사방으로 활보하고 다녀 산악인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적었다. 예티(Yeti)라는 영어 이름 자체가 '바위산에 사는 곰'을 뜻하는 티베트어를 옮긴 것이기도 하다. 사이크스는 예티를 신비한 별종으로 믿어온 사람들의 실망을 의식한 듯 "과학은 증거를 살필 뿐,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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