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김치와 김장 문화가 오는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어 무 배추 고추 마늘 양파 등 김장 재료로 쓰는 5대 채소류 작황이 모두 좋아, 올해 37년 만에 대풍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도 이어졌다. 김치와 관련해 기쁜 소식이 잇따르고 있지만, 농민이나 김치 생산 업체들은 울상이다. 국내 김치 시장 상당 부분을 중국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김치 종주국 한국에서 조만간 제대로 된 국내산 김치를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치를 놓고 벌이는 한ㆍ중ㆍ일 삼국의 전쟁에서 한국은 번번히 패하고 있다. 김치 무역 수지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은 2007년 3,550만달러의 큰 폭의 적자를 본 뒤 2009년(2,310만달러 흑자)를 제외하고 매년 420만~2,74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 중이다. 김치 수입물량의 99.9%는 중국산. 매년 1억달러(약1,000억원)어치 안팎의 김치가 국내로 수입된다. 그나마 일본으로 수출하는 국내산 김치 덕택에 김치의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고 있지만, 올해 8월까지 중국으로 수출한 김치는 단 한 포기도 없는 실정이다.
드라마 대장금 인기의 영향으로 한국 김치에 대한 중국 내 수요가 늘고 있다. 최근 5년간 인천공항면세점에서 팔린 김치(97억원)의 41%를 중국 여행객이 사갔을 정도다. 이 때문에 고품질 김치의 중국 수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런데 올해부터 수출길 자체가 막혔다. 중국이 한국 김치에 대해 국제식품규격(CODEX) 대신 중국 국내 규정인 '김치 100g당 대장균군 수가 30개 이하'라는 검역기준을 적용한 때문이다. 이는 '파오차이'라는 중국 전통 절임채소 위생기준으로 끓는 물에 삶는 파오차이와 달리 김치는 발열처리를 하지 않아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 김치 수출 업체들은 지난 2009년부터 정부가 나서 중국이 김치위생기준 개정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다.
국내에 수입되는 중국김치에 대해서도 농민단체와 국내 김치 생산업체들은 한국산 김치가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산 배추김치의 경우 엄격한 식품안전규제를 받는 반면 중국산 김치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 해썹(HACCPㆍ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인증이 대표적인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위생시설을 구비해야 하고, 해썹 전담 인력을 고용해 제조 공정상 위해 요소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매년 관리 점검표를 평가 받아야 해 작성해야 할 문서도 산더미다. 한 소규모 김치 생산 업체 관계자는 "수입김치와 제조원가 경쟁에서 밀리는데 식품안전규제가 국내 김치업체 숨통을 더 죄는 셈"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김치 생산업체들은 몇 해째 수입 배추김치에 대해서도 해썹 인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2014년부터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내놓은 채 움직임이 없어, 업체들은 속만 태우는 실정이다. 김문겸 중소기업 옴부즈만은 "워낙 재료비가 싼 데다 위생 인증도 받지 않아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김치를 국내 업체들이 당해내긴 힘들다"며 "동등한 해썹 제도 시행이 시급한데도, 관계 당국은 내년부터 검토를 시작하겠다니 답답한 노릇이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배추만 국내산이고 그 외 재료는 수입 농산물이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혼합재료가 들어간 김치가 국내산으로 둔갑해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국산 양념 속을 국내산 배추와 버무린 짝퉁 국내산 김치가 30~40% 정도 저렴한 가격에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산 양념 속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국회 농림축한해양수산위원회 이운룡(새누리당) 의원은 "국내산으로 둔갑하는 중국산 김치 속에 대한 원산지 단속도 전무하다"며 "김치 양념 속에 대해서도 국제상품분류체계(HS코드) 적용하는 등의 대책을 즉시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네스코는 김치와 김장 문화에 대해 "한국인의 일상생황에서 시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이 한국인들에게는 이웃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편 그들 사이엔 연대감과 정체성과 소속감을 증대시켰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산 김치의 침범에 속수 무책인 배추와 김장 재료 생산 농가들은 1976년 이후 처음으로 모두 생산량이 모두 늘어나는 대 풍년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밭을 갈아 엎을 걱정에 시름만 깊어지고 있다. 전북 고창의 한 김장용 배추 재배 농민은 "많이 갈아 엎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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