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광신(fanaticism)'은 한국 사회에서는 개념 자체가 그리 친숙하지도, 서구에서 통용되는 의미 그대로 쓰이지도 않는 것 같다. '유사종교 신도들의 불합리한 신앙 행위' 정도가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그래서 이 용어가 활용되는 서구의 정치적인 맥락과 의미를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저자의 작업을 따라가는 내내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역자가 책 끝에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fanaticism'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종북'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조교수로 영국에서 주목 받는 젊은 좌파이론가인 저자는 '광신'을 보편타당한 정치적인 목표를 향해 비타협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에게 붙은 낙인과도 같은 것이라고 본다. 딱지를 붙인 사람들에게 '광신'은 '불합리한 일탈이며, 교육과 강제의 결합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가 노예제를 찬성하는 이념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광신자 무리'라고 불렀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유주의는 '하층계급과 유색인종을 타자화하면서 등장'했고 그 이념이 일부 사람들에게 지고의 가치로 대접받기 까지는 '자유주의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근본주의적 광신이 필수'였다고 지적한다.
중세의 천년왕국운동, 농민혁명가들,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까지 '광신'이라는 딱지가 붙은 운동과 세력을 분석하며 저자는 광신이란 '타협의 거부를 동원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광신은 '정치적 협의를 위한 일련의 기준을 적용해 본다면 말할 것도 없이 반자유주의적이고 불관용적'이지만 '기존 정치의 틀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해방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런 급진적 시도를 만들어 낸 원인과 대면하기를 거부할 때 그 사회는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역량을 상실하게 된다'고 꼬집고 있다.
다소 난해한 내용인데다 문장들이 매끄럽지 않아 술술 읽어가긴 어렵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은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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