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세프가 추진하는 'Schools for Asia' 현장 탐방차 네팔에 다녀왔다. 'Schools for Asia'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 11개 국가의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교육 지원 사업이다.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아시아만 해도 수천만 명에 이른다. 네팔은 독일과 핀란드의 지원을 받아왔는데 내년에 후원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네팔 대표부에서 한국위원회 쪽으로 도움을 청해온 것이 계기였다.
유니세프엔 수혜국엔 대표부, 지원을 하는 나라에는 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우리나라는 1950년 3월에 대표부로 출발했다가 94년에 위원회로 바뀌었다. 43년 동안 수혜를 받아오다가 94년에 공여국으로 전환한 것이다. 94년 이후에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된 나라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작년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가 되었지만 그동안 내 일에 치여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처음 현장에 가보았다. 유니세프의 기본 이념은 평등이고 일하는 곳은 현장이다. 예를 들어 같은 유엔의 산하기관인 유네스코가 첨단 기술의 대학을 하나 세우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유니세프는 모든 어린이가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수백 개의 학교를 세우는 것에 의미를 두는 차이가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백신을 개발한다면 유니세프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현장으로 들고 가는 역할을 한다.
떠나기 전 스케줄을 받아보니 일정이 아주 빡빡했지만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큰 긴장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카트만두를 떠나 네팔군즈, 줌라, 줌라 안에서도 오지인 랄라리히 마을의 학교들, 어린이클럽, 여성쉼터 등을 방문하는 동안 내 등은 점점 곧추세워졌다. 그들의 방식대로 함께 먹고 생활하며 그곳 어린이와 여성들을 만나고 현지 학교들을 다녀보는 동안 후원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이 현장의 열악한 사람들의 삶 속에 투입되어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는지를 목격하는 일은 슬픔이기도 했고 기쁨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히말라야의 나라로 상징되는 네팔은 1995년에서 2006년까지 십 년 동안 내전이 있었고, 2008년부터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다가 2011년 철수했다. 작년에 치러졌어야 할 제헌선거가 계속 연기되어 현재 네팔 정부는 행정부만 있고 입법부가 없는 상태다. 올 11월 19일에 제헌선거를 치른다고 한다. 당연히 그들이 '번다'라고 부르는 시위가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반 사람들 표정은 온화했고 거리에서 만난 어른이나 아이나 목소리 톤을 높이는 이가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어떤 풍경들이 그곳으로 이사가 있는 듯해서 발걸음을 멈출 때도 종종 있었다. 초인적으로 일하는 그쪽 스태프들과 네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어린이와 여성들의 실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전통과 가치기준이 있으니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대로 흘러가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면도 있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현지인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가보고 아동 노동에 내몰린 어린이들을 만나보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과 대면할 때면 매번 고름이 터질 때나 느끼는 통증이 몰려오곤 했다. 학교 대신 남의 집이나 철공소로 일하러 가는 아동 노동자들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고, 안보고 안들은 걸로 하고 싶은 일들이 줄을 이어서 보고 듣느라 발걸음이 두어 시간씩 늦어지곤 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거리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이나, 우리 돈으로 660원만 있으면 해결되는 밥을 먹지 못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을 볼 때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여성이 자기 자신은 희망이 없고 다섯 살 된 아이가 카트만두로 가서 학교에 다녔으면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눈앞이 아득해지곤 했다. 문화가 다른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여성이 월경을 시작하면 부정하다 하여 사람들과 격리시켜 바람막이도 안되어 있는 외양간 같은 움막에서 혼자 지내고, 아이를 출산할 때도 부정하다 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움막에서 혼자 출산 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을 부정 탄 사람이라고 가까이 가지 않는 현실에 내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성장하는 어린이들, 특히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질펀한 소똥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산길을 올라가다가 열 살 안팎의 두 소녀를 만났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켜켜이 쌓아 올린 나뭇단이 너무 커서 소녀들이 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우리에게 길을 비켜주느라고 머리에 이고 무거운 나뭇단을 길에 내려놓았는데 그때 보니 맑고 순한 검은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무심코 다가가 소녀들이 이고 내려오던 나뭇단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성인인 내 힘으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다시 머리에 이고 저 길을 내려가나…. 눈앞이 막막해져 차마 湄뭬?볼 수가 없었다. 남의집살이를 하거나 식당에서 일하는 어린이클럽의 아이들과 면담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하나같이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절실히 드러냈다. 그 나이에 학교 다니고 공부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어린이 클럽에서 만난 아이들에겐 그것이 꿈이었다.
네팔의 주택 56%가 화장실이 따로 없어 위생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은 알고 갔는데도 학교에조차 화장실이 없었다. 있는 화장실도 재래식으로 오픈 되어 있어 머리가 좀 큰 여자아이들이 나중에 학교에 가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다. 네팔 사람도 잘 모르는 사과가 많이 난다는 마을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 기안큰자 초등학교 갔을 때도 생각난다. 그곳에선 32명의 남자아이와 19명의 여자아이가 유니세프 교육프로그램을 받은 현지 선생님들과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무겁던 내 마음이 그곳에선 환해졌다. 아이들이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책상에 엎드려 받아쓰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축구를 하고 있어서다. 그 아이들로 인해 내가 위로 받는 순간이었다. 헤어질 때 한 여자아이가 내게 막 달려오더니 아직 덜 익은 노란 사과 한 개를 부끄러워하며 내밀기도 했다. 그들은 자라서 분명 또 다른 희망을 세상에 퍼뜨릴 것이다.
앞으로 봐도 옆으로 봐도 산뿐인 산악마을에 들어선, 유니세프의 후원을 받고 생긴 조산원에 찾아간 날도 있었다. 조산원 덕분에 그곳 여성들이 움막 대신 그곳에서 출산을 하고 있었다. 문화가 달라 처음엔 조산원에 오려고 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지만 그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한 덕분에 현재는 조산원을 넓히는 공사를 계획 중이었다. 조산원은 병원 역할도 같이 하고 있어서 내가 찾아갔을 때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안고 한 시간 반을 걸어온 엄마의 아이가 진료를 받고 있었다. 약을 받아 들었을 때 그 엄마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내 마음속에 접혀있다. 유엔차가 들어가기도 힘든 오지에 유니세프의 손길이 들어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그곳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하곤 했다. 아마도 가난 때문에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생명을 잃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이 노동에 내몰리거나 방치되어 있는 모습만 보고 왔다면 맥이 빠져 이 글을 쓸 힘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12년에는 세계 유니세프 36개국 후원국들 중 모금순위가 일본 미국 독일에 이어 네 번째로 높았다. 그 힘에 의해 오늘도 어디선가 어린이가 노동하는 대신에 손에 연필을 쥐고 있고, 아픈 아기를 업고 한 시간 반을 걸어온 엄마가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네팔에서의 7박 8일은 이처럼 모르는 후원자들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순간들과 조우였고, 학교 담장에 올라앉아 떠나는 내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을 돌아보며 서울로 돌아가면 너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기꺼이 정성껏 할게, 내 자신과 약속하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신경숙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