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엔 팔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아픕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주민 김선이(44)씨는 지체장애1급이다. 다리를 못 써 집 밖에선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한다. 가뜩이나 거동이 불편한 그를 더 괴롭히는 건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 등 교통약자를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그의 집, S아파트다.
주차장부터 난관이다. 아파트 장애인 주차장은 좁아서 보조기구를 쓰는 사람이 차에 타기 힘들다. 집에서도 멀다. 김씨는 관리사무소에 부탁해 집 앞에 전용주차장을 얻었다. 승강기 문에 걸리는 휠체어는 회사에 두고 다닌다.
겨우 집에 들어와 목발을 내려놓으면 김씨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다. 모든 설비가 비장애인 키에 맞춰 설계됐기 때문. 앉은키가 70㎝ 남짓인 김씨는 변기에 앉으려고 매번 세면대를 부여잡는다. 요리할 땐 높은 의자에 힘겹게 올라야 한다. 김씨는 "의사가 어깨 그만 쓰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웃었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BF) 설계는 김씨 같은 교통약자를 위해 탄생했다. BF는 교통약자도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도로, 건축물을 짓는 설계 방식. 과거엔 휠체어용 경사로를 설치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최근엔 동선과 주택 내부 설계까지 고려하는 개념으로 넓어졌다.
중견건축업체 코에코(COECO)가 지난해 경남 함양군에 지은 집이 대표적인 BF주택이다. 60대 노부부가 90대 아버지와 함께 사는 단층주택은 입구에 경사로가 있다. 당장 휠체어를 쓰는 사람은 없지만 미래를 고려한 것. 복도엔 노인이 잡고 걷도록 손잡이(핸드레일)이 달렸다. 화장실 바닥엔 마찰력이 큰 타일이 깔렸고, 욕조는 노인이 타고 넘기 쉽도록 턱이 낮다. 욕조 안에도 손잡이가 있어 낙상을 막는다.
정형준 COECO 건축사는 "손잡이 설치비용은 전체 건축비의 1%도 안 된다"며 "BF설계는 적은 비용으로 편리하고 안전하게 집을 바꾼다"고 말했다.
BF설계는 사회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BF를 적용한 건축물에 등급을 매기는 'BF인증' 제도를 시행 중인데, 2008년 4건에 그쳤던 인증건수는 지난해 115건(준비단계 포함)으로 늘었다. BF인증 심사를 맡은 한국장애인개발원은 "주차장에 경사로가 있어도 동선이 길거나 위험하면 BF인증을 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수치뿐만 아니라 알맹이도 나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림산업 삼성물산 등 대기업도 BF아파트를 지었거나,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BF설계가 사회에 안착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인지도가 낮고 시장이 좁아 민간에선 활용폭이 좁고 확산속도도 느리다. 지난해까지 전체 BF인증 278건 중 아파트는 26건에 불과했고, 그 중 10건은 SH공사와 지역도시공사 물량이었다. BF인증을 받아도 별다른 혜택이 없는 탓. 정 건축사는 "자재 구입이 어려워서 주문 제작하거나 일본에서 수입한다"고 했다. 대기업 BF설계도 경사로 설치 등 주요 건축물의 접근도만 높인 수준이다.
정지영 서울장애인연맹(서울DPI) 사무처장은 "고령화가 먼저 진행된 일본에선 BF개념이 문맹이라도 불편 없이 건물을 이용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까지 발전했다"며 "국민의식 개선, 고령화 속도에 따라 한국에도 BF설계가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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