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신문이 인터넷이나 SNS에 많이 양보했지만, 한동안 '오늘의 역사' '오늘의 소사(小史)' '일사(日史)' 등의 문패를 단 고정란이 빠지면 신문 모양이 어색했다. 소개된 내용 가운데는 문패처럼 그날의 역사로 끝난 게 대부분이지만, 더러 그날의 역사 변화만으로 역사의 변화 전체를 더듬을 수 있는 소재도 적지 않았다. 오늘 맞는 '국제연합일'이 대표적이다. 그 역사는 가히 한국 현대사의 중심 종단면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 공식명칭보다 '유엔 데이(UN Day)'가 널리 쓰인 것만도 한 시대의 집단 동경이 읽힌다. 최고 선진국이던 미국과 영어를 향한 '접속 원망(願望)'이 누구나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었던 말에 응축된 결과다. 이맘때인 운동회 날 아이들 머리 위에서 온종일 나풀거렸던 만국기와 함께 선진 문물, 외래 문화에 대한 희구까지 담았다. 그러나 이날의 국경일 지정은 잠재의식을 넘어, 정부에서 시작해 나중에 국민 인식에 뿌리를 내린 고마움의 결과였다.
▲ 해방 이후 한국은 유엔에 많은 신세를 졌다.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섰을 때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북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았을 때 사상 최초의 유엔군 파견으로 북의 적화통일 기도를 막았다.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인천상륙작전 이튿날인 1950년 9월16일 '유엔 데이'를 국경일로 지정했으니, 당시 유엔이 베푼 구명의 은혜에 대한 정부의 고마움이 얼마나 컸나를 실감한다.
▲ 그 모든 게 유엔이 아니라 그것을 이끈 미국 등 우방국 덕분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76년 '유엔 데이'를 국경일에서 배제한 이유는 북한의 유엔산하기구 가입에 항의한 것이었지, 유엔의 대한 국민 인식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더욱이 국제 환경의 변화로 그런 항의는 무의미해졌다. 그런데도 한글날과 달리 '유엔 데이'의 국경일 복원 주장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주장이 시대착오와 무지의 징표로 여겨질 지경이니, 세월 따라 역사인식도 참 많이 변했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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