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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0월 23일] 존재의 이유를 잊은 SH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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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0월 23일] 존재의 이유를 잊은 SH공사

입력
2013.10.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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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SH공사가 공급한 서울 돈암동의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16년동안 아이들과 함께 살아오던 정모씨. 작년 8월 정씨에게 갑자기 임대차계약해지와 함께 집을 비우라는 날벼락같은 통보서가 날아들었다. 임대주택을 중복분양 받았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정씨는 전혀 모르는 문제였다. 사정은 이랬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아오던 정씨는 1993년경 박모씨와 재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툼이 생겼고, 98년경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지만 남편 박씨는 이혼합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정씨는 연락이 끊긴 박씨의 주민등록을 2000년 5월경 말소시킨 후 14년 동안 혼자 살아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소식이 없던 박씨는 충남 태안에 살고 있었고 2010년 12월 LH공사가 태안에 분양한 국민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입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씨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합의 이혼을 하지 못한 채 법률상 부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임대주택을 중복 분양 받은 것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박씨가 임대주택을 분양 받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된 SH공사는 정씨가 96년에 이미 임대주택을 분양 받았는데 2010년 박씨가 또 다시 임대주택 분양을 받았으므로 '허위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임대주택을 분양 받았다'고 보아 주택임대계약을 해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부랴부랴 박씨를 수소문해 정식으로 이혼절차를 밟은 후 박씨와 사실상 이혼상태였고 정식 이혼까지 한 사실을 설명하고 박씨의 주민등록이 말소된 서류까지 증거로 제출했지만 SH공사는 법대로 할 수 밖에 없다며 막무가내였다.

SH공사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었다. 첫째 임대주택법은 중복당첨을 받은 사실 자체를 계약을 해지사유로 하지 않고 악의적인 중복분양의 경우에만 해지사유로 해놓고 있다. 대법원은 최근 "형식적 배우자에 불과한 경우에는 그 배우자가 다른 임대주택을 분양 받은 경우에도 계약해지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법률해석의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도 SH공사는 정씨의 하소연에는 귀를 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둘째 정씨가 임대주택 분양 받은 사실이 전산에 등록되어 있었으니 같은 세대원으로 되어 있던 박씨가 임대주택을 중복분양 받는 것을 얼마든지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다. SH공사는 LH공사와 전산망이 통합되지 않아 사전 적발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제일 뿐 정씨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니었다.

셋째 공사의 주장대로 시스템의 미비로 인해 중복분양이 되었다면 중복분양된 것을 제거하고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였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정작 중복분양을 한 LH공사는 박씨가 정씨와 뒤늦게라도 이혼을 했기 때문에 박씨에 대한 분양을 취소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같은 임대사업자인 LH공사와 SH공사가 달라도 너무 다른 법률 해석을 하고 있었다.

SH공사는 대법원 판례도 무시한 채 정씨를 상대로 올해 초 명도소송을 제기하여 힘없는 임차인을 기어이 쫓아내고야 말겠다는 뜻을 행동에 옮겼다. 그러나 소송과정에서 LH공사가 박씨의 당첨을 취소할 의사가 없음이 확인되었고 재판부로부터도 법률해석을 제대로 한 것인가라는 질책을 받자 재판에 출석도 하지 않고 주장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지난달 패소판결을 받고 말았다.

SH공사는 무주택자들에게 임대주택을 공급하여 국민주거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목적의 사업을 하는 곳인 이상 임차인의 주거안정을 최우선해야 할 기관이다. 대법원 판례까지 무시하며 임차인을 상대로 무모한 소송을 벌이는 것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잊은 처사다. 지난주 SH공사가 지난 10년간 아파트분양사업을 통해 올린 수익이 1조9,000억원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내게는 그 보도가 곱게 들리지 않는다. 그 돈이 힘없는 국민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대가로 번 돈은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소송을 당한 후 거리로 나앉게 될까 두려워 잠을 못이루던 정씨의 고통이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장진영 변호사·서강대 로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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