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카리브해 연안국들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상대로 식민지배 당시 노예무역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추진하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16~19세기에 걸쳐 자행된 노예무역으로 인한 인명ㆍ인권상 피해는 물론, 식민지배ㆍ노예제가 국가 발전에 끼친 부정적 영향까지 배상하라는 것이 이들 국가의 논리다.
카리브공동체 소속 14개 국가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영국 법무법인 리데이는 "내년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재판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마틴 데이 대표 변호사는 "카리브해와 서아프리카에서 자행된 노예무역과 노예제 식민지배는 악명 높고 유례없는 사건"이라며 "일부 원고 국가들은 공판을 앞두고 교육ㆍ경제적 기회 박탈에서 보건 문제까지 식민지배의 피해 규모를 광범위하게 산출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소송에 참여한, 서인도제도의 소국인 안티구아바브다의 볼드윈 스펜서 총리는 "우리가 자원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우리 국민을 노예 삼아 부를 착취했던 식민지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은 6월 영국 정부가 케냐 독립투쟁조직 마우마우 조직원에 대한 가혹행위를 사과하고 피해 배상을 결정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이는 영국이 식민지배 당시 발생한 범죄행위를 배상하는 첫 사례였다. 개별적으로 배상 소송을 추진해오던 카리브공동체 국가들은 7월 트리니다드토바고에 모여 공동 대응 방침을 결정하고, 케냐 소송을 맡았던 리데이를 법적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피소된 3개국 중 영국은 2006년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 이듬해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이 각각 노예무역에 유감을 표명했다. 네덜란드는 올해 7월 루드빅 어셔 사회고용부 장관이 유감 표명을 했다. 이들 국가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사들여 카리브해 등 아메리카 식민지에 파는 방식으로 노예무역을 했는데, 16~19세기 운송된 흑인노예 수는 1,500만명으로 추정된다. 1807년 노예무역제를 폐지한 영국은 1833년 노예소유주에 대해서만 200만파운드의 피해보상금을 지불했는데, 이는 그 해 정부 지출의 40%, 오늘날 기준으로 210억달러(22조3,083억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NYT는 그러나 카리브해 국가들의 승소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로저 오키프 영국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배상은 사건 발생 당시 국제법에 저촉됐을 때 성립하는데,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식민지배가 만연하던 당시 불법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흑인노예 후손들이 노예무역에 관여한 미국ㆍ영국 기업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소송을 진행했지만 승소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피소국 중 유일하게 식민지배 배상 결정을 내렸던 영국도 "케냐에 대한 배상은 영국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옛 영국 식민지에 선례가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소송 당사국 측에서도 여론전과 외교적 압박을 통해 피소국들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데이 변호사 역시 "역사적 문제는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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