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일을 제대로 하려면 기자정신에 투철해야 한다. 기자는 취재 보도와 신문 제작의 프로여야 한다. 프로의 1차적 생명은 일에 대한 전문성, 철저성, 독점적(또는 배타적) 권위 등일 것이다. 프로라면 이런 여러 요소를 바탕으로 맡은 일을 충실히, 창의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자정신에 매몰돼 인간성을 잃거나 전문인으로서의 도덕성이 희박해지거나 공공선을 망각한다면 큰 문제다. 프로의 덕목으로 도덕성, 정직성, 성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원전 비리로 도마에 오른 것도 전문성만 내세웠지 프로로서의 도덕성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기자정신의 반대말은 맨정신”이라는 이야기는 알량한 전문성을 내세워 독점적 권위에 의지하거나 우월적 지위를 누리려 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늘 갑인 것처럼 대접받으려 하거나 까불지 말고 설치거나 나대지 말고 넘겨짚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말이다.
하기야 요즘은 폼 잡아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정보 취득이나 전문성에서 기자들을 뺨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정보 취득의 신속성 정확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쓰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런데 설 땅이 이렇게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들만 잘난 줄 아는 기자들이 있다.
기자들은 오랫동안 편하게 살았다. 기사 써주는 걸 대단한 선심으로 알거나 신문에 사진 내주는 것을 큰 서비스로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태도가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다. 미담이나 좋은 업적을 쌓은 사람들을 기사로 쓰면 으레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많다.
특히 지방 주재기자들 중에는 기자인지 지역유지인지 장사꾼인지 모를 사람들이 꽤 있었다. 1980년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 통폐합에 따라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기자라는 이름으로 온갖 횡포를 부리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지역 신문이 너무 많고 언론사 존립이 어려워진 지금은 또 다른 횡포와 비리가 벌어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느 신문사의 지방 주재기자가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런 명언을 남겼다. “기사만 안 쓰면 신문기자 할 만한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박수치고 웃으며 동의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돼 언론계의 전설로 길이 남게 된 말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기사를 잘 쓰지 못했다. 팩스도 뭣도 없어 본사에 기사를 보내려면 우편으로 부치거나 열차나 비행기 편에 실어 보내고, 급한 것은 전화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작문’이 안 되는 그는 일단 전화기를 들고 “XX시는 20일...”까지 앞머리만 기세 좋게 부르고는 그 다음부터는 말로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서울 본사에서 전화를 받은 기자가 대신 써주었고, 신문에 기사가 나가면 그 사람은 자기가 쓴 거라고 자랑하며 뻐기고 재곤 했다.
기사 써주면 대접 받지, 술 얻어먹지, 명절 때 선물 받지, 서울 본사 데스크가 내려올 때 잘 모시면 계속 편의 봐주지, 시장 서장을 비롯한 기관장들이 지역 유지로 대접해주지, 전화로 호통 치고 으름장 놓으면 기업인들이 촌지 들고 와 바치고 광고 주고... 얼마나 좋은가? 오직 불편하고 성가신 일은 기사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기사만 안 쓰면 신문기자 할 만한데”라는 말이 안 나오겠느냐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건가? 수술만 안 하면 의사 할 만하고, 재판만 안 하면 판사 할 만하고, 수업만 안 하면 교사도 할 만하고, 훈련만 안 하면 군인도 할 만하고, 범인 잡는 일만 안 하면 경찰도 할 만하고, 집안 일만 안 하면 주부도 할 만하고... 에라이, 순!
그런데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사실은 그런 생각 누구나 다 한다. 하는 일이 어렵고 힘들면 그럴 수 있다. 표현의 정도와 내용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 이걸 짐승으로 바꿔서 말해볼까? 안심 등심고기만 안 되면 소도 할 만하고, 경마만 하지 않으면 말도 할 만하고, 삼복 잘 넘기고 똥만 잘 참으면 개도 할 만하고, 통닭만 안 되면 닭도 할 만하고? 아, 이건 좀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영 말이 안 된다. 말만 안 되나? 소도 개도 닭도 다 안 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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