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간 수상 경향 변화… 패러다임 전환형 연구가 대세로 새 실험장치·방법도 수상 가치연구 인정받기까지 고난과 수모… 그룹서 쫓겨나거나 지원 못받아"동료 심사 통과 못하는 게 노벨상 받는 연구의 본질" 제기도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은 세포 내 물질의 운송 경로를 밝힌 연구에, 물리학상은 현대 입자물리학의 근간인 '힉스' 입자를 처음 제안한 연구에, 화학상은 화학반응을 컴퓨터로 대신할 수 있게 만든 연구에 각각 돌아갔다. 생리의학상은 기초생물학 수상이 많았던 최근 경향이 그대로 반영됐고, 물리학상 역시 대다수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다만 이론화학(계산화학) 분야의 수상은 화학계에서도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노벨상은 세계의 연구 흐름을 보여준다. 분야별 변화 양상을 읽어내고, 발전과 수상 가능성이 높은 연구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과 한국연구재단(NRF)이 올해와 지난해 각각 내놓은 노벨상 관련 보고서들을 토대로 수상 경향을 분석해봤다.
독창적 개념ㆍ실험방법에 주목
20세기 초반 노벨물리학상은 주로 원자 내부의 구조와 특성을 밝힌 연구가 받았고, 중반부터는 양자물리학과 핵물리학 분야가 수상을 다퉜다.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페르미 등 교과서에 나오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대부분 이때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시기까지의 수상 업적은 대부분 실험을 통해 이론을 입증하거나 이론을 통해 실험을 예측하는 등 기존 물리학 패러다임을 명료하게 확인하거나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실험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나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해 물리학계를 흔들어 놓은 연구가 노벨상을 자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원자나 이온을 오랫동안 일정한 조건에 놓고 연구할 수 있는 기술(이온포획분광법)을 개발해 1989년 수상한 한스 데멜트(미국), 볼프강 파울(독일), 노먼 램지(미국)를 시작으로 양자(더 나눌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파괴하지 않고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는 실험방법을 개발해 지난해 수상한 세르주 아로슈(프랑스), 데이비드 와인랜드(미국)까지 말이다. 이온포획분광법 덕에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원자의 초미세구조가 밝혀졌고, 양자 실험은 양자컴퓨터 개발의 핵심 토대가 됐다.
노벨화학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최근 30년 간 수상 업적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개념을 입증한 연구, 다른 분야에 응용될 수 있는 독창적인 기구나 실험 방법을 개발한 연구가 많다. 예를 들어 1993년 캐리 멀리스(미국)에게 수상을 안겨준 중합효소연쇄반응법(PCRㆍ특정 유전자를 증폭하고 분리하는 기술)은 생물학 기초연구는 물론 의약품 디자인, 법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기존 이론이나 실험과 아예 대치되는 사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시킨 업적이 화학상을 받은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예로 1980년대 초반까지는 단백질만 효소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1989년 화학상을 받은 시드니 올트만(미국)과 토머스 체크(미국)는 유전자(RNA)도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처음 알아냈다.
생리의학상에서 가장 뚜렷
노벨상에 선정된 과학 연구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학계의 기존 패러다임을 굳히거나 넓힌 유형과 아예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꾼 유형으로 말이다. 노벨상 초기에는 첫 번째 유형이 많았지만, 최근 30년 간 수상 업적의 상당수는 두 번째 유형인 '패러다임 전환형' 연구에 속한다.
이런 경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게 생리의학상이다. 지난 30년 간 생리의학상 수상 내역을 살펴보면 기존 패러다임과 이어지는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한 업적이 대다수다. 그 중 2000년 이전에는 독창적인 실험 시도가 몰랐던 생명현상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가 많았다. '샌드위치 실험'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개발해 오염물질로만 알려졌던 산화질소가 혈관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발기부전치료제 개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1998년 수상(로버트 푸르고트, 루이스 이그나로, 페리드 무라드, 이상 미국)이 좋은 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새로운 실험장치나 방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생리의학상 수상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추세다. 배아줄기세포로 생물에 유전자를 주입하는 원리를 알아내 특정 유전자가 없는 실험동물을 쉽게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로 2007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마리오 카페키(이탈리아), 마틴 에반스(미국), 올리버 스미시스(영국)와 체외수정을 통한 시험관아기 탄생 기술을 확립해 2010년 수상한 로버트 에드워즈(영국)를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특정 유전자가 없는 실험동물은 신약이나 치료법 개발 연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시험관아기는 불임 부부에게 새로운 희좇?됐다.
도전과 모험에 고난 겪기도
학계의 틀을 깨는 연구는 동료 과학자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마련이다. 패러다임 전환형 연구를 기존 틀 안에서 보면 너무나 불확실하고 연구의 필요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이런 갈등을 겪곤 했다. 2011년 준결정(액정ㆍ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인 물질)을 발견한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단 셰흐트만(이스라엘)은 1980년대에 몸 담고 있던 연구 그룹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그런 물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유사한 분야를 연구하는 동료들에게 심사(peer review)를 받아야 한다. 200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로버트 호비츠(미국)는 "노벨상 수상 연구의 상당수는 동료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노벨상 받는 연구의 본질"이라 말하기도 했다.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오히려 홀대 받는 연구였던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덕분에 연구비를 지원받기조차 어려웠던 수상자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2000~2008년 노벨상을 가져온 논문 93편의 연구비 지원 기관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중 약 70%만이 기관명을 밝혀 놓았다. 나머지는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연구가 대부분일 거라는 추측이다. 2008년 생리의학상 수상자 카페키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연구비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노벨상을 받은 논문을 쓸 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노벨상을 다수 배출한 나라도 이런데 국내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다. 모험에 도전하는 과학자는 소수고, 남들 다 하는 연구에 사람도 돈도 많이 몰린다. 사실 기존 틀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시도에 눈을 돌리는 연구가 늘수록 이를 둘러싼 내부 갈등도 줄어들 거라는 예상은 과학계 내부에서도 나온다. '패러다임 전환형 과학연구와 노벨상' 보고서에서 홍성욱, 이두갑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노벨상을 받은 많은 업적은 연구가 시작될 당시에는 크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며 "'지금' 중요한 연구에만 모두가 집중하면 노벨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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