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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리뷰] 엄마라는 인생의 길목에서 문득 지나온 길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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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리뷰] 엄마라는 인생의 길목에서 문득 지나온 길을 돌아보다

입력
2013.10.1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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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결혼 생활·노년의 고통… 친근하며 평범한 일상 통해 여성의 자의식 담긴 9개 단편 수록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선정되기도영화화 된 '어웨이 프롬 허' 원작 '곰이 산을 넘어오다'도 수록돼 있어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올라… 국내에서도 '노벨상 효과' 톡톡히

앨리스 먼로(82)의 주인공들-주로 여성-은 대개 기로에 서있다.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각각의 동사가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장소 부사구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실상 구태의연하다. 전자는 결혼으로 대표되는 가정이라는 제도(혹은 가부장적 억압으로 숨통을 틀어막는 캐나다 온타리오의 시골 마을), 후자는 독립된 자아가 보장된 듯 보이는 보다 큰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다. 남들 보기엔 더없이 평온해 보이는 결혼(가정) 생활이지만, 칼날 같은 고독에 베인 아내(딸)들은 황량한 내면을 감춘 채 그저 안간힘을 다해 이 형해만 남은 유대의 공동체를 견디고 있다. 위로와 공감과 유혹과 일탈을 갈망하면서.

여기까지 듣고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주부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는 흔해 빠진 '아줌마 소설'을 써왔다는 혐의를 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에게 적용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나 밖에서나 늘 온화하고 우아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이 노작가는 이런 통념에 기초한 예단을 단숨에 뒤엎어버리며 읽는 이의 가슴을 싸하게 훑고 가는 찰나의 충격을 가한다. 떠나는 모험 대신 머무는 결단을 내리는 쪽인 먼로의 주인공들에게 어쩌면 단편이라는 형식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머물며 견뎌낸 이들, 소설 속 표현을 빌자면 "삶의 심연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리고 마는 생의 통찰들. 이로 인해 먼로의 소설은 편편이 마지막 페이지 읽기가 두렵고 떨린다.

은 열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쓴 먼로의 작품목록 중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는 근작에 속하는 2001년도 작품집이다. 그 해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된 먼로의 칠순 기념집 같은 이 책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주로 193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은 어느 것 하나 태작이 없지만, 읽다가 울컥 하는 순간이 빈번해 책장 넘기기가 수월치 않았다면 아마 '쐐기풀'에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덟 살 여자아이였던 시절 '나'의 아버지는 집 우물이 말라버리자 외지의 기술자를 불러들인다. 그가 호텔에서 숙식하며 동네 우물들을 손보는 사이 '나'는 그의 아홉 살 아들 마이크와 가까운 친구가 된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사춘기적 감정에 휩싸인 '나'는 그러나 기술자가 모든 과업을 마치고 아들과 함께 홀연히 떠나면서 산사태를 당한 것 같은 삶의 붕괴를 경험한다. 그것이 강렬한 첫사랑이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 이혼녀가 된 후에도 부인할 수가 없다.

"위선이나 박탈감, 수치심 없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두 딸과 남편을 놔두고 떠난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며 새로운 연인과 목하 열애 중이지만, 갖가지 종류의 슬픔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다. 소설은 1979년의 여름 마이크와의 우연한 재회로부터 시작한다.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 서니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머물기 위해 떠난 '나'는 역시 서니 남편의 친구로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마이크를 거짓말처럼 만나게 된다. "다소 희극적인 행운의 눈부신 점화." 둘 사이에는 때 이른 사춘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전류가 또 한번 흐른다.

하지만 여성해방운동과 히피혁명을 30대 후반에 겪었던 먼로는 욕정의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쐐기풀'의 '나'에게 결코 마이크와의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곳은 "출산과 육아라는 기능으로 점철된 시기, 모성적 체액이 우리를 압도했던 시기에도 여전히 시몬 드 보부아르나 아서 쾨슬러에 대한 토론을 그만둘 수 없었던" 사이였던 옛 친구 서니의 집. 아무일 없이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듯한 마이크에게 '나'는 "내 삶의 모순과 슬픔,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건은 마이크의 제안으로 골프클럽에 함께 나갔던 '나'가 혹독한 폭풍으로 마이크와 부둥켜 안은 채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오후의 한때에 발생한다. 숲 속에서 만난 폭풍으로 홀딱 젖은 두 남녀가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 사건이 아니다. 비가 갠 맑은 하늘 아래를 걷던 마이크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라며 털어놓은 비밀과 그 비밀이 불러일으킨,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삶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마이크가 작년 여름 차를 후진하다가 세 살배기 막내아들을 치어 죽게 했다는 것보다 그의 아내가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도 그를 용서했다는 것이 사건일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 모든 것을 함께 겪어냈다."

"우리가 다시 만났더라도 옛날과 다른 뭔가가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 만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만이 제자리에서 달콤한 실개천이나 지하의 암반수처럼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 위를 덮은 이 새로운 정적과 봉인의 무게를 안은 채 그 어떤 모험도 무릅쓰지 않고." 둘은 그 날 이후 한번도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

스무 쪽 남짓에 칠팔십 년에 달하는 생애 전체를 담아내는 단편소설 최고의 기예가로서의 면모는 이 책 도처에서 두드러진다. '어머니의 가구' 속 주인공 앨프리다 고모는 어머니를 잃고 '나'의 아버지와 한 집에서 자란 사촌이다. 분방한 태도와 기묘한 외모로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고모. 하지만 작가가 되려는 대학생 '나' 는 고모의 초대에 마지못해 응했다가 램프 폭발로 인한 화상으로 사흘 만에 죽은 고모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것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문장들을 삶의 비의를 품은 절창으로 바꿔버리는 먼로의 마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일 것이다.

"그때 네 할머니가 내게 말했어. '보지 않는 것이 나아. 지금 엄마 얼굴이 어떤지 모르지? 그런 모습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싶진 않을 거야.' 근데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 줄 아니? (울부짖으며) '하지만 엄마는 날 보고 싶을지 모르잖아요' 라고 대답했단다." 웃음을 터뜨린 고모는 덧붙인다. "내가 예쁘고 큰 치즈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엄마가 나를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잖아요라니." 누구에게나 나는 사랑의 주어일 뿐 아니라 목적어이기도 하다. 주어와 목적어로서의 사랑을 각기 질량으로 측정한다면, 저울추는 어느 쪽으로 기울까.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편지가 세상 오갈 데 없는 부엌데기 하녀와 생이 온통 실패로 점철된 남자를 부부의 연으로 묶어주는, 체호프의 '입맞춤'을 연상케 하는 표제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남편 친구의 장례식에서 만난 의사와 하룻밤의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여생을 보내는 아내의 이야기 '기억'도 이 작가에게 헌정된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는 수사가 결코 과찬이 아님을 입증한다. 치매에 걸린 늙은 아내가 요양원에서 만난 다른 노인과 사랑에 빠진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망각된 남편의 고통을 그린 '곰이 산을 넘어간다'는 줄리 크리스티 주연의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오늘날의 한국 독자,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흡착력 강한 작가는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노벨상 반짝 효과겠지만, 그의 소설은 이번 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에서 10위권에 한 작품, 20권 안에 또 한 작품이 들어왔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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