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시장 가설 내세운 유진 파마 '주식시장은 투자자 합리성에 기반'2008 블로벌 금융위기 발생하자 로버트 실러 등 행동경제학 부상
보통 우리는 어떤 자산이나 물건의 가격이 가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억짜리 집이 4억이고, 9억짜리 집이 9억인 이유는 그 집의 가치가 그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주식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과 잘 들어 본 적 없는 기업의 시가총액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 주식의 가치가 가격에 반영돼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는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투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야만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는 가격이 나올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1960년대 이미 정립됐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라는 것이다. 이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 한 명인 유진 파마 시카고대 교수 등은 단기 주가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주식시장을 둘러싼 모든 정보는 곧바로 노출되며 합리적 투자자들은 이를 다 고려해서 투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정보가 주가에 곧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오랫동안 주식시장을 지배했고, 이 가설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개별 종목을 골라 펀드에 넣는 일반적인 펀드와 달리 시장(전체 주가지수)의 움직임을 수동적으로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다. 1990년 먼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윌리엄 샤프 등은 이 가설을 토대로 수익이 변동 폭(베타)에 연동한다는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CAPM)을 만들었다.
하지만 CAPM, 그리고 이 모형이 신봉하는 베타는 사실 주가 수익률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한 라스 피터 한센 교수는 1982년 계량경제학에서 지금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분석 틀인 일반적률법(GMM)을 개발해 냈는데, 이 GMM을 사용하여 CAPM을 검증한 결과, 이 모형이 역사적 주가 움직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CAPM에 의한 예측치에 비해 실제 자산 가격의 변동성이 훨씬 크게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파마조차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장기간 추적 관찰 결과 베타가 수익률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스스로 발표하기도 했다.
파마의 저서는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으나, 그의 이론을 근간으로 한 투자론 책은 꽤 나와 있다. 개인 투자자들을 위해 쓴 버튼 G 맬킬의 도 효율적 시장 가설에 바탕을 두고 개인투자자들은 개별 종목을 사고 팔거나 액티브 펀드에 투자하지 말고 그냥 인덱스 펀드에 장기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내용이다.
파마를 비롯한 '효율적 시장' 신봉자들은 투자자들의 합리성을 믿는다. 일부 잘못된 판단을 하는 투자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장에서 바로 이들의 잘못을 이용해 이익을 얻는 '차익거래자'가 나타나 이 왜곡 현상을 상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장은 효율적으로 움직인다고 본다.
이들은 '버블'이라는 단어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파마는 주식뿐 아니라 주택시장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집을 살 때 매우 신중하게 고려한다"는 이유로 주택 거품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미 주택 버블이 폭발해 글로벌 금융 위기까지 발생한 후인 2010년에도 "거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며 "주택시장에 거품이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주식시장을 지배하던 2000년대 중후반까지, 파마는 노벨 경제학상의 단골 후보로 매년 거론됐다. 하지만 2006년부터 미국 주택시장 거품이 꺼지고, 이에 따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벌어지면서 2008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블랙 스완'으로 불린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효율적 시장 가설은 기반을 급속히 잃었다. 대신 부상한 것이 또다른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이다. 이들은 투자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본다.
실러 교수가 주가나 부동산 가격 등 자산가격을 장기적으로 관찰해 본 결과, 기업의 이익이나 주택 건설 비용 등 실제 가치의 변화에 비해 가격의 변동 폭이 너무 컸고, 이 괴리가 컸을 때 가격의 방향성이 급하게 반전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시장 참여자 대다수가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되면 주가는 실제 가치(펀더멘털)를 뛰어 넘은 '버블'의 영역에 다다르게 된다.
실러의 대표적 저서인 은 바로 주식시장에서 벌어진 거품을 정확하게 지적한 명저로 손꼽힌다. 미국의 나스닥 광풍, 한국의 닷컴 버블이 발생한 1999~2000년은 온 세계가 주식에 미쳐 있었다. 아무도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던 2000년에 실러 교수는 을 발표하며 주가에 거품이 끼어 있다고 정확하게 말했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주가의 장기적 흐름을 기업의 배당금과 비교하며 예측했던 실러 교수답게 1871년부터 2000년 1월까지의 장기간 주가를 기업의 이익과 비교 분석해 내놓은 결과였다. 바로 다음해 닷컴 버블은 엄청난 속도로 붕괴됐다. 은 국내에선 아쉽게도 절판된 상태다.
우리나라에 실러 교수가 크게 알려진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출간된 이라는 저서를 통해서였다. 공저자인 조지 애커로프 역시 2001년 노벨상을 받았다. 천재 경제학자 존 케인즈가 사용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금융과 경제에 왜곡을 가져오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의 주택시장 붕괴로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부도, 이어진 전세계적인 금융공황을 통해 인간이 이성적, 합리적 주체라는 데 의구심을 갖게 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해설서였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인기를 얻은 것은 실러 교수가 금융위기 2년 전 미국의 주택시장 붕괴를 정확히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5년, '케이스-실러 주택가격 지수'를 통해 주택가격을 장기적으로 분석해 온 실러 교수는 당시 미국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어 있다고 단언했다. 거품은 꺼진 후에 뒤늦게 깨닫는 게 보통이지만 실러 교수는 거품의 꼭대기에서 거품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그냥 '감'이 아니라 장기 가격 변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저서와 논문, 매체 기고 등 끊임없는 집필 활동을 통해 연구 성과를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알리려 노력했다. 실러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진작부터 거론돼 온 이유일 것이다.
올해 노벨 위원회는 실러 교수와 파마 교수에게 공동으로 트로피를 안겼다. 실러 교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경제학상 후보로 매년 꼽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후보군에서 사실상 빠졌던 파마 교수에게는 '오래 기다렸지만 받았다고 아주 신나지는 않은' 상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수상 발표 후 실러 교수는 기자회견까지 했지만 파마 교수는 말을 아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 전혀 동떨어져 보이지 않으면서도 파마에게 상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 노벨 위원회를 존경해야 한다"며 비꼬기도 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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