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간에도 밀양에선 70 전후의 노인들이, 일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느라 바쁠 일들을 젖혀두고, 산 속에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면서, 전쟁을 선포하듯 몰려온 3,000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송전탑 건설공사에 대한 항의와 투쟁을 계속 하고 있다. 2007년, 당사자인 주민들을 슬그머니 피해 시작한 공사로 급기야 2012년 노인 한 분이 분신자살을 했고, 지금도 묘자리를 파놓고 기름통을 옆에 끼곤, "이 더러운 세상, 더 살면 뭐하겠냐"면서 싸우고 있는 곳, 그곳이 지금 밀양이다. 거기서 듣게 되는 "목숨을 건다"는 말에는 결단의 단호함을 넘어 절망의 감정마저 진하게 배어 있다.
사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공사를 강행하려는 한전도, 또 그걸 옆에서 거들고 있는 정부도, '그래도 간다'며 헬리콥터를 날리고 중장비로 밀어붙이고 있다. '설마, 정말 죽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님, '죽어도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용산, 쌍용자동차의 경우는, 죽는다는 말이 은유가 아님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강하게 항의하고 저항할 땐, 필경 무언가 절실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목숨까지 걸고 그럴 때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경우, 거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그 이유에 대해 성심껏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에서든, 세간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윤리에서든, 혹은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며 흔히들 터득하는 삶의 지혜에서든 어디에도 공통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정부에선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항의에 귀기울이고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면, 이후 누구든 항의하고 투쟁할 것이며, 결국 정부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언제나 '생까며' 일축하고 강행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헌법은 누구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요구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조차, 그런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에 대해 '조정'과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항의에 귀기울이고 투쟁하는 이들과 타협하면 항의와 투쟁이 더 일어날 것이고 국가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타협도 해선 안됨을 강조하는 영화대사와 놀랄 정도로 똑같다. 우리 정부에게, 항의하는 국민이란 테러리스트와 마찬가지인 것일까? 테러리스트까지는 아니어도, 저런 식의 '원칙' 속에 전제가 되어 있는 국민의 상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 마땅한 주인(주권자)'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정부에 딴지를 걸 준비가 되어있는 방해자들, 잠재적 적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의 항의나 투쟁으로 어떤 정책이나 사업이 방향을 바꾸거나 중단되는 '전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 지금 정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을 다루는 유일한 원칙인 것 같다. 이는 쌍용차나 용산, 강정이나 밀양에서 반복하여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나라는,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기 위해서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패배와 몰락이, 심지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해야 할 것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는 게 고전적인 비극의 기본 구조다. 그렇게 패배하고 죽는 자, 혹은 그런 식으로 몰락하는 자를 '영웅'이라고 한다면, 누군가의 죽음이 명시적으로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위해 그 죽음을 향해 사람들을 몰고 가는 이들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나는 악마가 있다곤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국민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게 만드는 국가나, 그렇게 예견되는 죽음을 향해 그런 국민들을 몰고 가는 이들을 보면, 악마란 없다는 내 생각이 너무 순진한 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 정말 우리는 악마의 손 안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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