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이 그 기춘이야?" 선배는 씩씩거렸지만 난 설레였다. '복어는 남들과 먹으면 안 된다'는 참신한 뜻매김으로 우리나라 음식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분의 귀환에 필자의 누추한 20세기가 응답했다.
1989년 가을 밤 속초에서 때아닌 투석전이 벌어졌다. 수학여행에 달뜬 우리들은 포항에서 온 여고생들과 호기롭게 사진을 찍었고, 그이들 중 누구의 주소를 받았다는 둥 시시콜콜한 얘기를 영웅담처럼 늘어놓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다급한 외침이 방방마다 전달됐다. "경상도 아이들이 쳐들어왔다!" 돌이 날아온다는 소식에 몇몇이 어렵게 구한 돌로 응수에 나섰다. 고함이 돌과 함께 날아왔다. "우리 여자들을 건드린 전라도 XX들 다 나와!" 여고생들의 피붙이나 동문인 줄 알았더니 대구 남학생들이었다. 다행히 양측 교사들의 중재로 상황은 싱겁게 정리됐다. 단지 '우리 여자들'의 지역적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라는 질문이 남았다.
몇 년 뒤 그분이 명쾌한 답을 주셨다. 지역에서 방귀깨나 뀐다(그분은 최근 '방귀 뀐 것까지 소문이 난다'고 고백했다)는 수하들과 비싼 복어 앞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는 '초원결의'를 한 것이다.
그분의 촌철살인은 "성은 다르나 의를 맺어 형제가 됐습니다 … 한날에 죽기를 원하니 …의리를 저버리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라는 도원결의 구절보다 강렬했다. 의리는 저버릴 수 있으되 지연으로 맺어진 결의를 어찌 인력으로 깰 수 있으랴.
그분의 금언은 청춘 연애의 지표였다. 잘 사귀던 처자가 문득 "(영남 출신) 아버지가 우리 딸은 호남 사람 만나지 말래"라며 안절부절못하면 어르고 달래다 그분을 떠올렸다. '참, 우린 남이지.' 다른 지역 또래 여성은 얼마든지 있고, 거창하게 지역감정 운운해봐야 자신만 구차스러웠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자 상대 가문의 고향부터 먼저 묻는 합리적인 연애의 기술까지 습득했다. 그분 덕에 최고의 아내를 만났다.
이후 "민주당을 목포 바다에 버리자"(2002년, 친박 올드보이 서모씨) 등 그분의 명언을 급조한 아류들의 말의 상찬들이 이어졌지만 그분처럼 자학(自虐)을 살신성인의 혼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에 이내 잊혀졌다. 그분도 퇴장했고 세상도 달라졌다. 나 역시 지역을 안배해 친구를 사귄 적도, 동향인 선후배만 각별히 챙긴 적도, 님도 아닌 남에게 '우리'라는 울을 씌워 죽자고 제안한 적도 없이, 세상 변화에 순응했다. 그럭저럭 살만했다.
'무릇 천하대세는 합쳐지면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지면 반드시 다시 합쳐진다'()고 했던가. "광주 북한군 개입" "광주의 딸" 등의 발언이 방송이나 국회에 버젓이 등장하고, 애국하는 국가정보원 직원도, 복어보다 홍어를 싫어하는 일부 네티즌도 그분을 앙망했다. 깡패들이 편집국을 유린한 한국일보 사태 때는 비리 사주 편에 붙은 동료가 "특정지역 출신들이 회사를 말아먹으려 한다"고 정치권에 읍소까지 했단다.
돌이켜보니 모두 그분의 귀환을 알리는 신령한 징조였던 것 같다. 그분이 승지 벼슬을 꿰찬 뒤엔 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선영까지 들먹이며 호남 안배 인사라고 추켜세웠던 검찰총장은 사생아 의혹으로, 보기 드문 호남 출신 수도권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라던 복지부장관은 항명 파동으로 옷을 벗었다.
호남은 본디 축첩과 배신을 잘 한다는 관련 사료가 기다렸다는 듯 사이버세상에 쏟아지는 걸 보면 명불허전 그분의 가르침은 계속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왕 실장'이란 세상 평판을 "귀만 있고 입은 없다"는 겸손의 덕으로 뭉개셨지만 20년간 박해 받던 그분의 사도(使徒)들이 이미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엔 외식도 하고 밥값도 내신다니 우리 음식역사에 또 다른 신기원이 열릴 것 같아 두근거린다. 그분을 오매불망 중용한 분께 감사드린다. 다만 그분과 '우리'가 될 수 없는, 앞으로 '설라디언'이란 해괴한 족속으로 살아야 하는 미천한 태생이 천추의 한이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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