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달변이었다. 질문마다 풍성한 답변이 쏟아졌다. 통찰력과 유머 섞인 대응도 변함 없었다. 그러나 달랐다. 호칭부터 그렇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그의 이름 뒤에 감독이 붙었다. "2년 반 동안 감독으로 일하다 보니 지금은 익숙한 호칭"이라며 밝게 웃었지만 긴장감을 감추진 못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환히 웃던 그가 "불안하고 떨린다. 제가 이렇게 약하다고 느낀 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박중훈(47) 감독을 17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28년 배우로 살아온 그는 자신이 생애 첫 메가폰을 쥔 '톱스타'의 개봉(24일)을 앞두고 있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 각본까지 맡았다. 박 감독은 "배우는 감정을 보여주고 감독은 생각을 보여주는데 처음 제 생각을 보여줘서 그런지 부끄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안 맞았다는 둥 여러 핑계거리가 있는데 감독은 그러지도 못하는 자리"라며 웃었다.
'톱스타'는 인기 배우 장원준(김민준)의 매니저 태식(엄태웅)을 중심에 놓는다. 배우가 꿈인 태식은 원준의 음주 뺑소니 죄를 뒤집어 쓴 덕에 TV 드라마의 배역을 얻게 된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태식도 덩달아 유명세를 얻고 톱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상전처럼 굴다 형처럼 태식을 대하던 원준은 태식을 시기하고, 태식은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욕망에 불타오른다.
영화는 태식의 사연을 통해 영화 동네, 넓게는 연예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욕망과 암투를 비춘다. '유명세가 사람을 괴물로 만들더라'는 대사 등에 톱스타로 살았던 박 감독의 삶이 배어있다. 박 감독은 "제 모습이 많이 담겨 있다. 앞으로 감독을 하고 싶어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다른 영화를 못 찍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20대 30대 때 제 위주로만 살았어요. 인기라는 권력이 있었으니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고교 때 공부를 못해 열등감이 있었는데 배우가 되니 정반대가 됐죠. 세상을 만만하게 봤는데 50이 다돼 지금 돌아보면 섬뜩해요."
그는 "마흔 넘으면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어 가슴이 답답했다"며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삶에 회한이 들었고 부끄러웠는데 4,5년 전부터 영화로 풀어내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영화 '체포왕' 출연할 때 너무 답습된 연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의미 없는 연기 대신 감독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고도 했다. 그는 "영화 현장에 30년 가까이 있다 보니 배우로 영화를 하나 감독으로 영화를 하나 별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배우 박중훈이 아닌 영화 하는 박중훈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카메라 앞에만 섰다가 뒤에 서 본 느낌은 어땠을까. 박 감독은 "뷰가 다르더라"고 답했다. 그는 "감독은 자기 분야만 깊게 파는 스태프들을 넓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깊게 멀리 보며 살아왔으니 다른 감독보다는 아마 (시야가)좁을 것"이라고도 했다. "감독은 성자나 악마의 길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는 듯해요. 내 머리 속에 영상화된 걸 다른 스태프를 설득해서 구현해야 하니까요. 저는 이번엔 성자를 택했어요. 촬영 중 화 한 번 내지 않았어요."
박 감독은 인터뷰 중 성찰, 겸손, 배려 등의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나이를 먹어가며 내가 참 피곤하게 살아 왔구나 깨달았다. 인생을 너무 공격적으로 살아왔고 삶의 소박한 행복을 놓치고 살아왔다"고 했다. "행복은 인간 관계에서 오지 성취에서 오지 않는다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그는 자신의 이런 성찰을 영화에도 반영했다.
그럼에도 "몸에 흐르는 피 때문인지, 단지 욕심 때문인지" 박 감독은 "아직 성취 쪽에 마음이 더 가 있다"고 고백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나쁜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자"며 마음을 다졌는데도 "최근 열흘 가량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도 말했다.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 하면서도 잠을 못 자요. 그러면 당황하고 멜라토닌을 먹고 자요(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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