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한 미술작가가 거지들의 돈통을 모아 전시를 하겠단다. 상자곽 안에 얼마가 들어있던 그 돈과 통을 통째로 사는 것이다. 그는 지하철역사를 뒤졌다. 그 과정이 만만치는 않았다. 구걸행위가 경범죄가 되어 걸인 찾기가 요새는 하늘의 별따기란다. 통행에 방해되는 구걸행위는 1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된다나. 이야기를 꺼내는 일도 녹록지가 않았다. 영업중인 거지에게 말을 걸어 그 돈통을 사고파는 흥정에 얼마나 분분한 논쟁이 있을 것인가.
좌우지간 이 불굴의 작가는 힘겹게 수소문하고 갖은 설득으로 50개 남짓한 각양각종의 돈통과 그 안에 적선 받은 돈을 모았다. 물론 액면가 보다 높게 웃돈을 주고 샀다.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거지도 있었단다. 누가 보아도 가치 없어 보이는 그 돈통이 당자에게는 매우 소중한 단 하나의 생계수단이더라는. 듣고 보니 그럴만도 하다. 목수의 톱이나 전공의 핀치, 이용사의 가위가 함부로 볼 대상이 아니라면 거지의 그것 역시 그럴 것이다.
미술작가는 걸인의 돈통을 전시하면서 여러 뉘앙스를 노린 듯하다. 잔돈을 구걸하는 사람에게 경범죄로 벌금을 매기는 세태하며, 돈을 주고 돈을 산 돈통이 오브제로서 자본주의의 한 편린을 드러내게 하는 효과와 그 아이러니를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상 그 이면에는 더욱 유혹적인 드라마가 깔려있다. 구걸해서 번 돈을 다시 돈을 주고 산다는 의외성이다. 누가 백원짜리를 천원에 사겠는가. 누가 헌 종이곽을 오천원에 사겠는가. 하지만 그 백원은 이미 조폐공사의 백원이 아니고 종이곽 역시 폐지를 다는 저울금에 매겨지는 그 값이 아니다. 의미가 생겨나 버렸다. 류현진이 던진 야구공이 그냥 야구공이 아니듯이.
야스미나 레자의 '아트'라는 작품을 보다 보면 이런 신비한 경험을 하는 순간이 있다. 화이트보드를 끊임없이 예술적 걸작이라고 우기는 연극이다. 누가 봐도 화이트보드다. 그런데 마지막 즈음 그 보드판에 낙서를 하려는 순간 관객은 경악한다. 걸작을 훼손하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걸 어쩌랴. 이미 화이트보드는 더 이상 화이트 보드가 아니다. 여기에 연극적 힘이 숨어있다.
여기서 더! 구걸을 하는 거지에서 상품판매자가 되었을 때 태도의 변화를 살펴보자. 미술작가가 '그 돈과 돈통을 좀 삽시다' 했을 때 거지는 아까까지의 비굴하고 불쌍한 표정을 담박에 버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오만하고 고압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중하고 허접하지 않은 돈통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역사성과 희소성을 부여할 것이고 그 잔돈 몇 백원이 십만원 상당의 과태료 위험수당을 담보로 얻어진 전혀 다른 고부가가치의 쇳덩이라며 값어치를 높이려 들 것이다. 거지가 약자에서 강자로 바뀌었기에 미술작가는 애원하고 매달리기 바쁘다. 두 사람은 이제 입장이 바뀌어 거지는 작가처럼 행세하고 작가는 거지처럼 변한다.
흥정이 끝나고 나서를 보자. 거지는 잔돈 오백원을 헌 음료수 종이곽과 함께 오천오백원을 받고 팔아서 실한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의외로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계수단을 너무 헐 값에 넘겨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이제 그 헌 종이곽은 거지의 기억 속에서 과장되기 시작하고 대단한 보석함처럼 조작된다. 한편 작가도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아무리 봐도 이번 돈통은 거지의 삶과 함께 해 온 종이곽처럼 느껴지지 않아서다. 방금 약국 앞에서 주워온 새 상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종이곽은 분명 동대문 역의 어떤 거지 앞에 놓였던 엄연한 진실이라고.
나는 작가에게 전시회가 끝나면 그 돈과 돈통을 무대소품으로 써서 연극을 올리고 싶으니 팔라고 했다. 의외의 대답이 재치 있게 왔다. '제 작품 꽤 비싼데요'. 길거리에서 대놓고 웃었다. 이원호 개인전 "층 STORY"는 쿤스트독에서 24일까지다.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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