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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막내절' 고성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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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막내절' 고성 화암사

입력
2013.10.1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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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직진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이 지시를 반드시 무시하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설악산 미시령터널 앞이다. 늘 깜박이 넣고 오른쪽으로 빠진다. 3,300원씩이나 하는 터널 통행료를, 그것도 현금으로만 받는 것도 이유지만, 그것보단 역시 울산바위의 장쾌한 파노라마를 그냥 지나치기 싫은 까닭에서다. 거대한 근육질의 암릉이 각도에 따라 다른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려면, 미시령 옛 도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가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돈을 더 내라고 한대도 옛길로 다닐 용의가 있다.

옛길로 미시령을 넘을 때 만나는 또 다른 반가운 풍경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절이 목적지다. 물론 터널을 통과해서도 이곳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쭉쭉 뻗은 새 길로 가다간 속도를 줄여서 들머리를 찾기가 힘들다. 옛길에서 커브를 하도 돌아서 이제 직진을 좀 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최근 새로 단장한 대명리조트 앞에서 절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화암사 3.3㎞'.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언뜻 안도현의 시 '내 사랑, 화암사'를 떠올릴 수 있겠다.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잘 늙은 절 한 채…" 어쩌고 하는 꽤 유명한 시 말이다. 다른 절이다. 그건 전북 완주에 있는 화암사(花巖寺)고, 이건 강원 고성에 있는 화암사(禾岩寺)다. 지도를 보면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상봉(1,242m)의 정동쪽에 있다. 그런데 이 절, 자기네 적(籍)을 좀 더 북쪽에다 얹어놨다. 꽤나 큼지막한 일주문 현판에 이렇게 여섯 글자를 새겼다. '金剛山 禾岩寺(금강산 화암사)'.

현재 바다와 접한 동부전선 이남의 산릉은 뭉뚱그려 설악산으로 지칭되지만, 옛날엔 이 절이 위치한 곳까지 금강산 자락에 속했던 것 같다. 삼십리쯤 더 위에 있는 건봉사도 금강산 건봉사다. '금강산 팔만구천 암자의 첫째 절'이라고, 그래서 화암사의 안내문엔 자랑스레 적혀 있다. 하지만 위치로 보아선 막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금강산의 막내 절, 화암사.

사적기를 좀 보자. 신라 혜공왕 5년(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대여섯 번 홀라당 불에 탔고 잿더미 위에 다시 기둥을 세웠다. 사실 천년 묵은 절의 내력이라는 것이 이무기 뱃속에 든 무당방울 같은 거라서, 어딜 가나 원효 의상이 터를 잡고 지눌 보우가 중건했단다. 그래서 잘 안 믿는다. 그런데 이 절엔 독특한 내력이 있다. 1991년 고성에서 열린 세계잼버리 대회 때 외국인들에게 보여준답시고 싸그리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1,700년 한국불교에서 국제대회 때문에 절집 지붕을 뜯은 일은 유일무이할 텐데, 기구하다고 해야 할 그 '중창 불사' 덕에 살림은 한결 나아졌다. 다시 천년이 지난 뒤, 이 사정을 후손들은 어떻게 사적기에 적을지 궁금하다.

각설하고, 절을 한번 둘러보자. 이런저런 사정을 떠나서 절의 자리가 참으로 훌륭하다. 험한 기세의 골산(骨山)인 설악산 비탈이 동해 쪽으로 누긋하게 펴지기 시작하는 곳, 산새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산중이지만 멀리 바다의 둥근 수평선이 열려 있는 곳에 법당이 앉아 있다. 법당 입구, 돌로 된 무지개 다리 아래 졸졸 흐르는 개울은 신선계곡의 꼭대기다. 설악산의 최북단 봉우리 신선봉(1,212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여기서부터 삼십리를 소와 폭포를 이루며 흘러간다. 그리고 숲. 이곳엔 참나무가 많다.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잎을 떨궈 놓으면, 이 가을 화암사로 가는 걸음은 카키색으로 한없이 포근할 것이다.

화암사를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면 족두리 같기도 하고 편썰기해서 그러모은 마늘 덩어리 같기도 한 바위가 빠지지 않는다. 수바위다. 볏가리 모양 같다고 해서 처음엔 화암(禾岩)이라고 불렸다.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화'자가 거듭된 화재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뒤에 물 수(水)자로 바꿨다. 빼어날 수(秀)자라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그 모습이 무척 늠름하다. 절 마당에 있는 찻집 란야원에서 문설주를 액자 삼아 바라보는 바위 모습이 제일이다. 그리고 차 한잔. 여기서 꼭 맛봐야 할 메뉴는 송화밀수이다. 송화 가루에 꿀을 섞었는데 그 고소함이 수승하다. 장삿집 얘기를 길게 하는 건, 차만 시킨 손님에게 찐 감자까지 한 톨 주기 때문이다. 걸어서 화암사까지 오르면 출출해진다. 말없이 배려하는 여주인의 공덕이 작지 않다.

절의 발치에 고급 리조트들이 몰려 있지만, 부러 화암사까지 찾아오는 여행객은 많지 않다. 물론 요즘엔 대절한 관광버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설악동이나 오색지구에 비하면 여전히 한갓지다. 이번 가을, 단풍을 보러 설악산을 찾았다면 짬을 내 들러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 총천연색으로 타오르고 있는 울산바위 너머, 설악 돌산의 거친 출렁임이 고요하게 잦아드는 자리에 이 절이 있다. 가을도 이 자리에서 고요해질 것이다. 가 봄직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여긴, 금강산이지 않은가. 권력자들이 크게 발심(發心), 아니 회심(回心)하지 않는 한 언제 다시 금강산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인데, 이 절집은 금강산의 막내 집이니 여기 와선 일만이천봉을 보고 간다고 해도 거짓될 것이 없다.

[여행수첩]

●홍천까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돼 있으니 그걸 이용한다. 동홍천IC부터는 46번 국도 이용. 인제에서 미시령옛길을 넘어 속초 방향으로 간다. 대명리조트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된다. 속초 쪽에서 오거나 미시령터널을 지났다면 원암교차로에서 대명리조트 방향으로 꺾는다. ●입장료나 주차료는 따로 없다. 경내 찻집 란야원은 오전 9시부터 해질녘까지 연다. 강원 고성군이 화암사에서 출발해 성인대를 돌아오는 숲길 산책로를 조성 중이다. 4.1㎞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울산바위와 동해를 함께 굽어볼 수 있다. 화암사 (033)633-0090

고성=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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