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부조리극의 대표격인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1969년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에 의해 국내 초연된 후 한국 연극계의 교범이 됐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Godot)를 한없이 기다리는 두 남자가 난독증에 가까운 이해불가의 대화를 서로에게 쏟아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 작품에는 스토리의 즐거움,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난해하고 어둡고, 당연히 재미없는 연극이란 꼬리표가 달려왔다. 하지만 매 공연마다 관객에게 시간과 인생, 그리고 구원이 갖는 다양한 해석의 재미를 던져주고 있어 현대극의 고전으로 꼽힌다. 각종 예술 페스티벌과 대형 뮤지컬들이 즐비한 10월, 대부분의 공연 팬이 소극장에 발붙일 여력을 내지 못하는 이때 두 개의 극단이 거의 동시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다.
가장 표준적인 산울림의 '고도'
우선 국내 초연을 했던 극단 '산울림'이 산울림 소극장 개관 28주년을 기념해 서울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에서 다음달 24일까지 공연한다. 총 2막으로 약 3시간 동안 공연하는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한 불어학자인 오증자 극단 '산울림'대표가 번역했던 민음사의 를 바탕으로 한 가장 표준적인 '고도' 이다. 베케트가 의미한 '고도'를 향한 기다림을 실감나게 체험하려는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무대다.
고도가 누구인지, 그가 언제 오는지, 이 물음에 인생을 천착하며 국내에서만 무려 1,200회 이상 '고도'를 올렸던 임영웅 연출이 1994년 이후 다시 고도를 기다리는 주인공 블라디미르로 돌아온 이호성, 영원한 에스트라공으로 불리는 박상종과 함께 무대를 꾸민다. 정나진, 박윤석, 김형복이 함께 출연한다. 장시간, 잡담을 이어가며 "시간 잘 보냈다"는 맞장구를 늘어놓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부담스럽지만 시간 앞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불안을 만끽할 수 있다.
장애인 배우들의 진정성 넘치는 '고도'
또 다른 '고도'는 같은 희곡을 기반으로 하지만 산울림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올해 밀양여름공연예술제에서 대상, 연출상, 남자연기상을 휩쓴 장애인 극단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서울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20일까지 공연한다. 이 공연은 원작의 대사를 4분의 3가량 줄였고 지체장애 배우들의 연기로 이루어져 80여분에 불과하다. 때문에 원작이나 다른 '고도'를 접한 적이 없다면 감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두 필부가 갖는 불안정성, 그리고 이들 대화의 무의미, 실재와 허구를 오가는 모습을 장애인 배우들이 표현함으로써 연극의 진정성에 더 근접했다는 평이다. 밀양예술제 심사위원들이 극단 '애인'을 택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진정성'때문이었다. 연출 이연주씨는 "고도를 기다리는 주인공들을 장애인이 표현할 때 더 현실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강희철, 한정식, 손정성, 백우람, 하지성이 연기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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