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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혼자이고자 하는 분투… 어느새 스며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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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혼자이고자 하는 분투… 어느새 스며들다

입력
2013.10.1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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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내는 시인이다.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나는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있을 것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보라. 물론 이 말은 역설적으로 반론을 전제하고 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만 5년간 신해철, 유희열, 이소라의 목소리로 2000년대 청춘들의 희로애락을 달랬던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MBC '음악도시')의 작가였고, 70만부 판매기록으로 여행서()의 역사를 새로 쓴 희대의 여행작가이기도 하며, 여행서 분야에서 탄탄하게 기반을 다진 신생 출판사(문학동네 임프린트 '달')의 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다른 이력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시인이고자 하는 그의 강고한 의지가 파생시킨 부산물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시와 사진과 여행과 에세이,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태도로서의 '포에틱(poetic)'이야말로 시인 이병률(46)을 우리 시대 감성의 아이콘으로 추어올린 원동력일 것이다.

9월말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이 출간 2주 만에 5쇄를 찍으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초판 5,000부가 나오자마자 소진돼 증쇄에 들어갔고, 순식간에 1만부가 넘게 팔려 현재 1만5,000부까지 제작됐다. 시집으로서는 '놀랍게' 온라인 서점 종합 판매 순위 20위권 안에 드는, '기염'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기록을 세우고 있다. 증쇄 속도로 보면 2006년을 강타했던 문태준의 에 비견할 만하다는 게 문지 쪽 설명이다. 이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감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결혼을 안 해서겠죠." 허무하지만 모든 기혼에게는 너무도 설득력 있는 대답. "제가 결혼을 했다면 가정을 지키느라 시도 못 쓰고, 여행도 못 했을 것 같아요. 자기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건 분명히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는, 매우 이기적인 삶이니까요."

이번 시집에는 단번에 스윽 써진 시들이 많다. 전보다 과감하면서도 평화롭고 말도 조금은 줄인 시들이 많아졌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시 쓸 시간이 부족했고, 그 덕에 에너지를 모았다가 한번에 터뜨릴 수 있었던 게 비결. "저는 태생이 시를 쓰려고 태어난 사람인데 운이 좋아서 여행작가가 됐죠. 여행작가로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강해질수록 시를 쓸 때는 사력을 다해 시 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슬그머니 시를 놓아도 되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구축됐건만 그는 "오히려 시가 더욱 간절해지는, 시를 쓰기 더 좋은 조건이 됐다"고 말한다. "시를 쓸 때 나는 자유로워요. 시단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도 다 알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오랫동안 그는 혼자서 떠도는 삶을 살아왔다. 떠돌며 시를 썼고, 사진을 찍고, 여행기를 썼다. 이번 시집에는 결과로서가 아니라 의지로서, 끝끝내 혼자이고자 하는 시인의 분투가 또렷하다. 아예 '혼자'라는 제목을 단 시에서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라고 자신을 일컫고,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라고 스스로의 운명마저 진단한다.

"혼자 쟁취해야 자기 것이 된다는 것, 내가 무언가에 도달하려면 혼자 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결여겠지만, 이것도 괜찮아요. 마흔이 넘으면서 사람하고 같이 살 수 없다는 확신 같은 것에 도달했어요. 장애이기도 하겠지만."(웃음)

혼자여서 즐거운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눈물들은 모든 것의 염분"('천사의 얼룩')이므로 이 시인이 무엇을 만들 건 그것의 질료는 슬픔이다. 그런데 그 슬픔이 또 삶의 질료가 된다. "슬픔은 제게 밥통 같은 거예요. 꺼내 먹기도 하고, 보온해 저장해 두기도 하고, 새로 짓기도 하고…. 그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닿을 수 없는 연이 많으니까, 불가능한 것 투성이니까."

사랑이란 청춘의 한 시절에 마스터하고 넘어가야 하는 교양 필수 과목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 이 시인은 꿋꿋하게 아직도 사랑을 노래한다. 하지만 언제나 혼자인 이 시인에게는 사랑 또한 아무리 길어도 찰나다. 정주(定住)야말로 지속 가능한 사랑의 필연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연인이란 여관 바닥에 녹아버려 흥건한 물자국으로만 남은 눈사람 같은 존재.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눈사람 여관')

"이번 시집은 사랑시들을 덜어내고 가볼까도 생각하던 중에, 독일에 있는 허수경 시인이 원고 좀 보여달래요. 그래서 보여줬더니 '야, 사랑시로만 한 권 묶어도 너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를 많이 아껴주는 선배의 조언이어서도 그랬지만, 또 이게 나인데 어떻게 감출까 싶어 그냥 다 실었어요. 3년 동안 많이 사랑한 흔적들이 시로 남은 거죠."

그는 문태준 시인에게 "너는 참 바보다. 이 좋은 걸 시로 쓰지 왜 아깝게 에세이에 다 써버리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저는 계속 혼자니까 그 감정으로 좋은 사랑시를 쓰고, 그게 힘들어지면 훌쩍 여행도 떠나고, 여행 중 뭔가가 떠오르면 또 산문도 쓰고 그러는 거죠. 저라는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은 거니까요. 저는 시를 쓰면서 조금씩 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제게서 점점 사람냄새가 난다는 것, 그게 참 좋아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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