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내부망의 익명게시판에선 정말 익명이 보장될까. 기자의 오랜 궁금증은 14일 김정석 서울경찰청장과의 간담회에서 풀렸다. 김 청장은 "익명으로 글을 쓰지만 알려고 들면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말 덕분에 최근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황정인 성동경찰서 수사과장 등이 제기한 경찰의 자성 촉구 목소리가 잇따라 외부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말뿐인 익명, 소통을 거부한 시스템이 그 원인이었다.
서울경찰청은 지난달 26일 권 과장이 한국일보와 인터뷰 한 것이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경고 조치했다. 서울경찰청은 권 과장이 인터뷰에서 "경찰 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말할 절차도 없고, 이야기 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도 문제 삼았다. 황 과장은 이달 9일 페이스북에 경찰 내부감찰에 대한 불만 글을 올렸다가 강남서에서 성동서로 전보됐다. 익명게시판이 제대로 작동하고, 수뇌부가 내부 비판에 귀 기울였다면 이들의 지적은 내부 논의를 거쳐 경찰 발전에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 같은 경찰 수뇌부와 일선 경찰관들 사이의 불통, 불신은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다. 민주당 유대운 의원실에 따르면 경감 이하 경찰관의 절반(50.2%)이 감찰권 행사에 대해 적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수뇌부와 하위직에 대한 비위 징계에 대해 70.4%가 불공정하다고 말했고, 하위직 경찰관의 수사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답변도 44.7%나 됐다.
경찰의 불통 분위기는 기자가 경찰청을 출입하던 3년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당시 채수창 강북경찰서장은 조현오 경찰청장의 성과주의가 지나친 검거실적 경쟁을 유발, 일선서의 피의자 고문, 전과자 양산 등 부작용을 낳는다고 비판했다가 파면 당했다. 성과주의에 대한 불만은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서도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이를 공론화한 서장이 경찰복을 벗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워 다들 입을 닫았다. 일선서의 한 경찰은 "권 과장과 황 과장에 대한 조치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도 3년 전 철권통치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입 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뇌부와 일선 경찰관들간 인식의 간극이 줄기는커녕 더 벌어질 지경인데도, 경찰 조직의 사실상 2인자인 김 청장은 그저 "소통을 통해 괴리감을 줄이겠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 캠페인 하듯 현장 간담회라도 열겠다는 뜻인가. 익명이 보장되지 않는 익명게시판처럼 공염불로 들린다.
허정헌 사회부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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