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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0월 15일] 지폐의 도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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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0월 15일] 지폐의 도안들

입력
2013.10.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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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유로화에는 다양한 건축양식의 문(門)들이 그려져 있다. 첫 인상은 좀 허전했다. 한국원화에는 세종대왕. 미국달러에는 조지 워싱턴. 중국위안화에는 마오쩌뚱. 무릇 지폐란 '나라의 위대한 얼굴'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던가. 외국여행을 준비할 때 특히 그런 느낌을 받는다. 여행의 첫 관문은 공항 게이트가 아니라 환전이다. 환전한 지폐 위의 근엄한 위인들이 미리 부터 그 나라를 소개한다. 그런데 EU는 나라가 아니니 나라의 얼굴이 없다. 나라 단위를 넘어선다는 건 얼굴의 묵직한 상징성을 해체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무엇이 얼굴을 대신할 수 있을까. 유로화 도안 공모전은 장장 6년을 끌었다고 한다. 언젠가 한 전시회에서 이 공모전의 낙선작들을 본 적이 있다. 그중 내 발길을 붙잡은 건 작은 생물과 과학의 아이템을 배치한 도안이었다. 500유로 앞면에는 도롱뇽이 있다. 뒷면에는 우주복을 입고 둥둥 떠가는 사람이 있다. 와. 저런 지폐로는 화성 왕복티켓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도롱뇽과 함께 하는 이 우주여행의 장면이 유로화에 채택되지 못한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유로화는 유럽연합을 대표해야 하니까. 나라 단위를 넘어, 유럽이나 아시아 같은 대륙 단위조차 넘어, 지구를 대표하는 지구-통화(通貨)가 필요할 어떤 미래에 비로소 이 도안은 다시금 떠오르지 않을지. 우리 모두 그저 지구인으로서 먼별의 존재들과 만나게 될 날에.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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