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라면 어른 팔뚝만한 재봉가위로 면도하곤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떠들썩한 세상 일에는 아예 마음을 안 두는 사람이다. 내심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사회니 정치니 하는 대화를 거드는 걸 본 적이 없다. 뭔가에 흥이 나서 한참 얘길 하다가도 그런 주제가 나오면 그는 금세 심드렁해 하는데, 그건 적극적인 거부라기보다는 남 일이라는 투의 방관이다. 제 일이라고 유난히 아금바른 것도 아니어서, 그에겐 생업이 있지만 놀 때가 더 많다. 어떤 이는 그에게 철 좀 들라고 타박하곤 하는데, 그런 말이 그에게 가 닿는지도 의문이다. 솔직히 나 역시 그 타박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없이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그와의 약속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난 건 요즘 널리 읽힌다는 좌파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들을 뒤늦게 찾아 읽으면서였다. 저자는 '개인화한 개인'들로 인해 '공공 영역'이 텅 비어버린 현실을 경계해야 한다고 여러 책에서 다양한 어조로 주장한다. '인간의 해방(개인화)이 그들을 (사회에)'무관심'하게 만들 거라던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의 150년 전 우려를 환기하며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라고도 썼다. 나는 그의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더부룩했다. 내 친구는 시민의 적인가? 그럼 나는?
바우만은 21세기의 근대를 지난 세기와 구분해 '액체 근대'라 부른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다 썼듯이 모든 근대는 과거의 '견고한 것들을 녹임(melting the solids)'으로써 제 길을 다져왔지만, 지금의 근대는 녹은 자리에 새로운 '견고한 것'들을 다시 놓기 위한 액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의 근대와 다르다고 보아서다. 그의 지적처럼, 이제 세습계급의 질서나 전통과 권위, 관습이 굳혀 온 사회관계의 그물망은 해체됐거나 느슨해졌다. 개인은 사라진 토대 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됐다. 실패의 책임도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한다. '사회는 없다'던 마거릿 대처의 말은 액체 근대의 이 불편한 진실을 차갑게 농축한 선고였다.
문제는 개인으로선 어찌해볼 수 없는 '여건'이란 게 있고, 자유로운 개인과 독립적 여건 사이의 간극은 점점 넓게 깊게 패여 간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개인은 스스로 정한 룰이 아닌, 휴식도 끝도 없는 의자 빼앗기 놀이를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많은 현안들이 그의 성찰적 프레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도, 나도 옹호하고 싶다. 바우만의 개인과 우리의 개인이 다르다 여기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서구의 역사는 500년도 더 전부터 부르주아라는 이름의 개인과 더불어 발전해왔다. 국왕을 폐위ㆍ투옥하고, 자유 평등의 이름으로 단두대에도 세워본 이들이다. 절대왕정조차 귀족 영주에 맞서 부르주아 개인들이 이룬 과실 아닌가. 반면 한국의 개인은 그 같은 권리와 위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일제하의 근대화한 개인도, 해방 이후 민주화한 개인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이념과 공ㆍ사적 진영의 이해 안에 갇힌 개인이다. 검찰총장의 사생아 의혹이 제기된 뒤 진위와는 별개로 '사생활이다-아니다'를 놓고 상대 신문의 과거 상반된 보도를 경쟁적으로 들추며 어긋난 논리만을 공박하는 이면에서도 나는 파당의 이해 앞에 가차없이 휘둘리는 개인과 사적 영역의 불안정한 위상을 본다. 한국 사회의 이 답답한 현실도, 텅 빈 아고라 탓이 아니라 아고라를 품고 있는 이 사회의 개인부재, 아고라의 시민들을 바라보는 정치권과 언론의 여전히 '녹지 않은' 인식 탓이 더 크다. 개인이 개인의 자존 위에 먼저 서지 않는 한 아고라의 시민들은 바우만이 호출하는 '공적 개인'이 아니라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가 걱정한 광기의 '맹신자들'이 될 수 있다.
서구의 액체 근대와 시차 없이 동행해 온 자본의 근대 안에서, 아직 개인화한 개인으로 성숙하지 못한 한국의 개인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은 비판이론이 경계한 국가권력의 관료주의적 촉수로부터도, 바우만이 경계한 액체 근대의 무차별적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개인을 편들고 싶다. 그게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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