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연극 'Mr. 매킨도ㆍ씨!'로 거금 3,000만원을 벌어들인 극단 '작은 신화'는 색다른 프로젝트를 꿈꾼다. 번역극이 범람하는 당시 연극풍토에 대항하려고 이 돈을 종자로 순수 창작극을 지원하고, 무대에 올리는 '우리연극만들기'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연극으로 번 돈을 연극에 투자해 창작극을 살리자는 극단 작은 신화의 열정이 어느새 20년을 맞았다. 프로젝트 결행 멤버인 최용훈 작은 신화 대표는 "북촌 창우극장에서 첫 무대 세팅을 올리던 날 서설이 내려 희망에 들떴지만 종자돈을 포함해 6,000만원을 날렸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회상했다. 작은 신화는 외부지원금이 있건 없건 총 23편의 창작극을 무대에 올렸다. 때로는 '땅을 파 마련한 돈'으로 명줄을 이어야 했던 프로젝트는 조광화, 오은희, 최치언, 고선웅, 김민정, 오세혁 등 출중한 연극인들의 등용문이었다. 자금난으로 매년 진행하려던 계획을 격년제로 운영해 올해 열 번째 프로젝트의 결실을 맺게 됐다.
작은 신화가 '우리연극만들기'로 올해 택한 작품은 거창연극제 대상 경력의 박찬규 작 '창신동'과 윤지영 작 '우연한 살인자'이다. 먼저(10~20일)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창신동'은 극단 '미인' 대표 김수희씨가 연출을 맡았다.
연극'창신동'의 무대는 지금도 미싱공장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원자재를 실은 오토바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다. 뉴타운 개발 붐으로 하루아침에 철거민으로 밀려났던 이들이 모인 동네. 가진 기술이라곤 바느질과 미싱돌리기가 전부였던 동식(김문식)은 노동운동을 하다 세상을 등진 사위를 따라 저세상으로 간 큰딸을 묻고 집으로 돌아온다. 걸음마도 떼지 못한 채 홀로 남겨진 손녀를 친딸처럼 돌봐주는 이웃집 연주(이혜원)는 동식의 집이 편하다며 이복오빠 현식(박지호)과 사는 집으로 가길 꺼린다. 동식의 손녀딸을 떠맡을까 전전긍긍하는 둘째 딸 정희(정의순)는 대놓고 연주가 아기를 데려가길 요구한다.
극 초반 전개는 매우 느슨하다. 캐릭터간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고 감초역할을 하는 동식의 동료 재광(김왕근)의 코믹 연기만 가끔 관객의 웃음을 유발할 뿐이다. 하지만 아기의 유일한 혈육 동식마저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으며 연극은 궁지에 몰린 아기의 삶처럼 가파르고 숨막히게 진행된다. 현식이 연주의 이복오빠가 아니고, 연주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철거용역이라는 사실, 그리고 연주의 몸을 탐했던 주변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창신동 동네는 지옥도처럼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다.
연주를 동네 남정네들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현식이 연주를 해치려다 거꾸로 죽임을 당하면서 '창신동'의 비극적인 공기가 눅진하게 객석으로 전해진다. 그 모든 아픔이 지나간 자리, 동식의 희생 덕분에 화를 모면한 연주는 아기를 안고 무대에 홀로 남는다. 참상이 벌어지고 인생이 구겨진 곳, 그래도 연주는 이곳 창신동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지긋지긋한 불운의 굴레가 뱀의 똬리처럼 자리하고 있던 창신동. 그곳에서 희생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진 이들의 삶은 희망을 모른 채 썩어간다.
박찬규 작가의 초고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했다. 이 여성이 노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얘기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 89%라는 50대들의 놀라운 투표율을 보고 작가는 작품을 새로 매만졌다고 한다. 그토록 현실변화에 위기감을 느꼈던 장ㆍ노년층이 산업화를 위해 매진했던 현장인 창신동. 그 현장에 고배율의 확대경을 들이대고자 했던 작가의 작품이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후줄근한 도시의 상처를 대변하지만 밝은 구석을 하나 남겨놓는다. 연주가 철거더미에서 살아남았듯이, 동식의 손녀도 연주의 손에 안전하게 넘겨진다.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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