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7일부터 시작되는 야스쿠니 신사 추계 예대제를 앞두고 또 다시 외교적 줄타기에 돌입했다.
그는 11일 BS후지 방송프로그램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의의에 대해 "영령에게 존숭(尊崇)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외국으로부터 비판 받을 일도 아니고 호전적이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추계 예대제 참배 여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지만 외교문제가 된 상황에서 갈지 말지를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즉답을 회피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를 직접 참배하지는 않는 대신 마사카키라는 공물을 보내는 방안을 고려중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주변에서는 아베 총리의 결정 배경에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가의 반발을 고려한 정치적 배려가 반영됐다고 평가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아베 총리의 이 같은 행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가 주도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배를 할지 말지를 두고 저울질을 해왔다. 올 4월 춘계 예대제를 앞두고도 참배를 강행할 듯 연일 분위기를 잡다가 결국 마사카키를 보내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을 앞두고도 이번에야말로 야스쿠니를 참배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나, 다마쿠시료(신전에 바치는 공물대금)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때마다 그는 매번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배려차원이었다며 생색을 냈다.
관련 전문가들은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두고 '우익인사 아베'와 '정치인 아베'라는 두 인격체가 대립, 갈등하는 구도라고 표현한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용의자로 분류됐던 인물로, 이후 정치적 족쇄에서 풀려나 일본 총리를 역임하며 헌법9조 변경,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주장했다.
외조부의 정치적 영향을 깊게 받은 아베 총리의 적지 않은 우익 성향의 행보는 외조부가 못다 이룬 꿈을 대리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뼛속까지 우익정서가 배인 아베 총리에게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외조부에 덧씌워진 전범의 이미지를 덜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반면 정치인 아베는 현실주의적이다. 아베 총리는 최근 미국으로부터 집단적 자위권 헌법해석변경 추진을 둘러싸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아베 총리가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베 총리가 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잇따라 정상회담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다면 정상회담은커녕 주변국과의 관계악화는 불 보듯 뻔하다.
아베 총리를 후원하는 우익 세력들의 입김도 만만치 않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9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1차 내각 시절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말했다. 이를 아베의 진심으로 받아들인 일본 우익세력들은 재야의 정치인에 머물러 있던 아베 대망론을 부각시켰고, 결국 지난해 12월 재집권하는 데 큰 힘을 실어줬다.
아베 총리는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로 인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주저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를 정상회담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라며 생색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결코 외교적 카드가 될 수 없음을 아베 총리는 인식해야 한다.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합사한 곳을 참배하는 것은 국제적 관례로 봐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최근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 일본을 방문, 야스쿠니 신사와 멀지 않은 지도리가후치 전몰자묘원을 참배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이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할 곳은 야스쿠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입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아베 총리도 더 이상 야스쿠니 참배를 정치 쟁점화하는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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