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사는 진세영(32)씨는 두 아이를 낳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첫째가 두 살 때 손에 물집이 생겨 병원에 갔는데 처음에는 피부염이라더니 나중엔 무좀이라고 하고, 도통 안 나아 다른 델 갔더니 수족구병이라고 하더군요. 둘째 감기 때는 돌도 안 된 아이에게 항생제 일주일 치를 줬구요. 과연 자기 아이에게도 그렇게 처방할까요?"그래서 그는 마포의료생협에 출자했다. 젊어서는 어지간해선 병원 안 다닌 게 자랑이라는 김재중(68)씨는 "이제 나이가 있으니 믿을만한 데가 필요해서", 새벽 5시에 가게 문 열고 밤 10시에 닫는 망원시장 서정래(52) 상인회장은 "왕진도 와 준다기에" 마포의료생협에 가입했다. 그런 이들이 금세 514명이나 모였다. 마포의료생협은 11월 1일 개원한다.
전국민 의료보험시대에 너도나도 의료생협을 찾는 이유는 뭘까. 한 마디로 '신뢰할 만한 병원과 의사가 없어서'다. 최봉섭 한국의료생활협동조합연대 상임이사는 "1시간 기다려 30초 진찰받고, 비싼 검사를 거듭 강요 받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의사들이 자신을 돈벌이 대상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에 대한 불신은 1차의료체계의 실패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차의료란 주민들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의료서비스로, 동네 의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재호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주민의 건강을 잘 이해하는 주치의는 주민의 건강증진과 질병 예방에 크게 기여한다"며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병원들이 상업화하고 환자는 대형병원만 찾다 보니 동네 의원들이 경쟁력을 잃고 주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임종한 인하대 의대 교수는 "주치의는 일종의 의료 도서관"이라며 "외국에서는 주치의가 환자들의 스트레스 관리, 체중 감량, 금연 등 건강과 의료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질병을 예방한다. 치료에만 급급한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주치의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건복지부와 일부 의료계에서 간간히 필요성을 제기해왔지만 주류 의료계의 반발로 번번히 무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라며 "현행 체제에서 병원은 짧게 진료해 환자를 많이 받아야 이득"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단 주치의제도 뿐 아니라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 ▲취약한 공공의료 ▲모든 의료기관의 무차별한 경쟁 등 한국 의료제도의 문제가 산적해있다고 입을 모았다. 임종한 교수는 "의료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무관심으로 1차의료 강화, 주치의 제도 등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의료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며 "의료생협은 국가 의료체계의 공백을 시민들이 스스로 채우려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의료생협이 한국 의료서비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1994년 첫 의료생협이 생긴 이래 수백 개가 만들어졌으나 처음부터 정체가 미심쩍은 곳이 많았고, 중간에 변질되거나 실패한 곳도 있다. 제대로 자리잡은 의료생협으로 평가 받는 곳은 현재 20여 곳에 불과하다.
시민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동참하는 의료인들도 늘고 있다. 현재 조합을 개설하고 새롭게 문을 열 채비를 하고 있는 곳도 서울 마포 외에 경기 이천 남양주 부천 등 세 곳에 이른다. 노령화와 건강보험 재정 악화, 국민 의료비 증가 등에 따른 위기감이 빚어낸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의료생협이 1차의료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심스러워했다. 이재호 교수는 "의료 생협이 훌륭한 1차의료기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지역 주민의 운동 차원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성공적이라고 평가 받는 의료생협들도 고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2009년 고려대 정부학연구소 김선희 연구원은 안성의료생협의 사례를 분석한 '주민자치 의료복지모델로 의료생협에 대한 탐색적 평가'에서 의료생협이 직면한 문제점으로 ▲의사결정구조의 저효율성 ▲재정적 불안과 부실한 재정관리 ▲조합원의 참여 부족을 지적했다.
하지만 의료생협 활성화가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안이라는 데는 다수가 동의했다. 임종한 교수는 "우리 의료생협은 정부 지원이나 사회적 관심 없이 개인들이 십시일반 병원을 세우고 운영해왔다"며 "정부가 토지나 건물 등 인프라를 제공하고 운영을 민간에 맡긴다면 의료생협은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탈리아나 스웨덴 등에는 지방정부가 예산을 제공하고 시민들이 운영하는 공공병원이 흔하다. 캐나다는 1970년 무상의료를 정착시키면서 연방정부가 동네병원(Community Hospital)을 만들어 시민에게 운영을 맡겼다. 일본에는 현재 조합원 270만명에 120여 개 의료생협이 있고, 3차의료기관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지난 6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안산의료생협과 전략적 제휴(MOU)를 맺고 1차의료활성화사업을 함께 전개하기로 했다. 최봉섭 이사는 "정치권과 관계기관이 譴?사례를 계기로 의료생협 활성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연대와 지원 방안을 모색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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